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씩스미미 Nov 30. 2023

그 선배의 한마디-2

놓지마. 절대.

 경제학과 신입생이 된 육00는 한 동아리방의 문 앞에 섰다. 그 이름도 거창한 「흑백사진예술연구회 샤프 - S.H.AR.P.」 ‘와.. 예술을 연구한다니... 개멋있는데...?’


 간판 옆에는 ‘35기 신입생 대환영! 우리 함께 사진 찍으며 여행 다녀요! 전시회는 덤입니다!’ ‘여행’과 ‘전시회’라는 솔깃한 문구가 나를 유혹했다. 그저 놀이도구 정도였던 필름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다는 설렘과 동시에 어떤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0.1초 정도의 망설임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가입하고 싶은데...”


 화학과 영문과 등등 다양한 전공의 친구들이 동방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스무 명쯤의 동기들이 생겼고 이내 들떠버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울 방방곡곡을 누비며 출사도 다니고 직접 현상과 인화도 하며 마냥 즐거운 동아리 생활을 이어갔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우리들은 취향도 비슷하고 대화도 잘 통했다. 물론 밤낮없이 마신 술병의 개수도 적지 않았다. “사진도 재밌는데 심지어 친구들도 너무 좋아!!!” 경제학과 동기들은 “쟤 동아리에 미쳤다” 했다.


 그러나, 그저 신나기만 할 것 같은 동아리 생활에 복병이 있었다. 이 동아리는 사진에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매주 사진 세미나에 참석해야 하고, 그 어떤 행사도 결석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정식 동아리원이 되기 위해서는 1주일간 밤낮으로 이어지는 테스트도 통과해야 했다. 게다가 선배들은 좀 무서운지, 매주 우리의 사진들을 그렇게 품평했다. “초점은 대체 뭐로 맞춘거야?”, “가르쳐준거 다 까먹었니?”


 사진이 좋아 동아리에 가입한 나와 달리 친목을 목적으로 가입한 친구들은 하나둘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와 친구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서로 의지하던 것도 아주 찰나, 그 친구마저도 군대를 이유로 2학년쯤 탈퇴했고, 마침내 우리 기수에는 내 이름 석자만이 남게 되었다. 찍어야 할 사진도, 열어야 할 세미나와 전시회도 많았지만 이 힘듦을 나눌 사람은 없었다.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한 채 미련하게도 혼자 끙끙 앓았다.


 그럴수록 더욱더 사진에 매달렸다. 낮에는 사진 찍고, 저녁에는 현상 하고, 새벽에는 인화하는, 그리고 날 밝은 아침엔 인화지값 벌기 위해 알바를 나는, 오롯이 사진으로만 가득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주변 지인들은 다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동아리를 하냐”며 미련하다 했다. 미련한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사진에 대한 마음은 점차 애증으로 바뀌어 가는 듯 했다.


 3학년이 되면 서서히 활동을 접는 것이 관례였고 나 역시 졸업 전 마지막 전시를 앞두고 있었다. 난생처음 풍경이 아닌 연출사진도 걸어보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사진들도 도전해보았다. 마치 아티스트가 된 것처럼 내 안에 있던 모든 감각을 다 꺼내놓았다.


 드디어 전시회가 열렸고, 가족 친구 선후배들이 전시회를 축하해 주기 위해 모였다. 수많은 손님들 중 한 중년 여성이 눈에 띄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도 저렇게 나이들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풍기는 특유의 아름다움과 지적인 멋이 있었다. 그 누구의 지인도 아닌듯한 그 여성은 꽤나 오랜 시간 전시회장을 돌아봤다. 이내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한 마디를 건넸다. “우리 00후배는, 후배만의 느낌이 있어. 사진 놓지 마.” 누구길래 내 이름을 아나 싶어 눈이 동그래졌는데 한 선배가 일러주었다. “우리 선배님이셔. 지금은 사진작가시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 그저 취미였을 뿐이었는데, 너무나도 벅차고 감사한 감상평이었다. 전문 작가의 평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감동도 아주 잠시,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같이 평범한 애가 무슨 사진이야. 그런 건 전문가들이나 하는 거지.’ 그렇게 나는 전시회를 끝으로 졸업을 했고, 취업을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멋진 카페에 가면 “샤프 뭐해 샤프~ 여기 예쁘게 좀 찍어줘!”라며 친구들의 농담 섞인 말들이 들린다. “야 샤프 다 죽었어~ 사진 다 엉망이야”라고 나 역시 맞받아친다. 마침내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SNS에 올리기 위한 감성 가득 사진을 찍어본다. 결과물은 영 엉망이다. 역시 샤프 다 죽었나 싶다.


 그런데 “사진 놓지마”라는 선배의 말이 왜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나는 건지. 10년 전의 고작 그 한 마디가, 사무실에 앉아있는 내 엉덩이를 왜 이렇게 들썩이게 만드는 걸까. 사진을 좋아하던 20대 시절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던 걸까. 방 구석에 박혀있는 고장난 카메라에 자꾸 눈길이 간다.     

이전 08화 그 선배의 한마디-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