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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스미미 Nov 24. 2023

그 선배의 한마디-1

레포트? 그게 뭔 데?

 창의적이고, 예술가가 많고, 직장생활 하기 힘든 mbti로 늘 infp가 1등이다. 선우정아도 infp인걸 보면 수긍이 가지만 9 to 6 회사 생활을 11년째 하고 있는 나 역시도 인프피라는 사실은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너희를 위해 일해주고 있다고!!! 나한테 잘해라!!!!!!’ 라며 회사를 향한 뱉지 못할 말을 일기장에 끄적이는게 직장인 인프피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월급쟁이가 디폴트값이었던 집안 환경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는 건 상상 속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끼리끼리 논다고, 친구들의 99.9%는 직장인이다. 친구들이 간혹 “사업이나 할까?” 내지는 “카페나 차릴까?”라는 말을 할 때마다 “야 사업은 아무나 하냐. 카페는 또 얼마나 많아. 월급쟁이가 짱이야. 매달 따박따박 돈도 나오고 얼마나 좋아” 라는 의견을 일관되게 피력해왔다. 그러나 이런 나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독서실에서 돌아와 새벽 2시까지 싸이월드 파도를 타야만 그날 하루가 마무리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 사진첩도 보다가 다이어리도 보다가 방향 없이 파도를 타던 중 모르는 사람의 싸이월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진들을 보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순간 외딴 소나무 사진이 눈에 꽂혔다. 초점이 나간 물체, 몽환적인 색감, 구름으로 가득한 배경 속에 빛을 내는 그 나무 하나가 내 뇌리에 박혔다. 대체 뭘 어떻게 찍었길래 이런 사진이 나오는지 싶어 사진 밑에 달린 각주를 살펴보니 ‘필름’, ‘YASHICA FX-D’ 라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다음 날, 무작정 동네 카메라 가게에 갔다. 메모지에 적힌 ‘YASHICA FX-D’를 사장님께 보여드리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필름 카메라네. 근데 이제 시중에서 못 구해. 중고로도 힘들걸?”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사진을 마주쳤던 그 미니홈피에 들어가 댓글을 남겼다. “이 카메라 어디서 사나요...?”


문제의 그 카메라. YASHICA FX-D


 난생처음 종로 카메라 골목도 가보고 온라인 중고거래 카페도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며칠을 망연자실 하던 중, 중고거래 사이트에 혹시 몰라 올려두었던 글을 보고 누군가가 쪽지를 주었다. ‘FX-D 사실래요? 렌즈 포함 13만원 입니다.’


 ‘아 드디어 매물 나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돈이었다. 매주 간식값 정도의 용돈을 받고 생활하던 고2 여고생에게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아시스와 같은 돈.버.는. 언니가 있었다.  “언니 나 할 말이 있어.. 실은 카메라가 너무 가지고 싶은데......” 돌아오는 말은 역시 예상한대로였다. “고등학생이 카메라는 무슨 카메라야. 공부안하고 사진 찍으러 다니려고?” 하지만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내 성격을 언니도 모르지 않았다. “나 진짜 너무 가지고 싶은데... 카메라 사도 공부 열심히 할게!!!” 언니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그래. 그럼 레포트 써 와. 보고 생각해볼게”


 ‘레포트? 그게 뭔데?’ 고등학생이 레포트라는걸 써본 적이 있겠나. 기껏해야 논술 준비한다고 한두번 글 써본 게 다인데. 하지만 꽂힌 일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육하원칙과 기승전결의 완벽한 흐름으로 ‘절.대. 공부에 지장 받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독자 맞춤형 결론의 레포트를 무려 10여장 분량으로 작성했다.


 나의 잠재적 투자자에게 당당히 레포트를 제출했고, 언니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얘가 진짜 써왔네’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 번 쓱 읽고 난 뒤 그녀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 사줄게.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공부 열심히 해!”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그 카메라가 마침내 내 손안에 들어왔다. 2008년의 매주 토요일 오후는 오롯이 카메라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점심 먹고 독서실을 나와 눈에 보이는 버스를 타고 어딘지도 모를 정류장에 내려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때로는 교실에서 춤추는 친구를 찍기도, 새로운 옷을 사 신나 하는 친구를 찍기도 했다.


 나에게 필름카메라란 학창시절을 재밌게 보내게 한 놀이도구였다. 인화된 사진들을 보며 언니와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그 놀이도구가 서른셋 먹은 지금까지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마냥 웃었다.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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