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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l 01. 2020

애 많은 엄마의 하루 한 장면 시리즈 <2>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록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록.
[애 많은 엄마의 하루 한 장면 시리 2]



#1. 그때 그 말 
"그래도 집이 최고다 그치?"
근처 바닷가에 가서 1박을 하고 집에 왔는데 이 말이 절로 나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어렸을 때 여행을 다녀오면 엄마 아빠는 늘 말했다. 내 집이 제일 편하다고. 짐정리부터가 벌써 귀찮아 보이는데 왜 돌아와서 편하다고 하는 건지 의아했다. 마치 어른들이 뜨거운 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 하는 것처럼. 이젠 그때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일 거리만 잔뜩인 이 지루한 집이 새로운 숙소만 못한 것 같아도 사실은 제일인 거.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는다는 건 남녀 사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가 보다.


#2. 재미
갯벌에서 아들이랑 바지락을 캤다. 조개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간이 나올 때면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만하자 해놓고도 한 번 더 파면 나올 것 같고, 저쪽으로 자리 한 번 더 옮기면 나올 것 같고. 도박도 아닌 것이 중독성이 강하다. 계속 쪼그려 앉아있으니 허리가 아팠다.
"에휴. 겨우 이게 뭐라고 내 허리랑 바꿀 수는 없지. 그만 하자." 했더니 아들이 말했다.
"겨우 이게..라고 하기엔 엄마가 너무 재미있어하는데?"
맞다. 재미. 그걸로 충분하지! 뜨개질이든 뭐든 돈벌이가 안 돼도 무용해 보여도 재미있으면 그걸로 가치 있는 건데 자주 잊는다.


#3. 대파 한 단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늘 미뤄뒀던 대파 소분 작업을 했다. 고작 한 단인데 매운 게 올라와서 눈물이 저절로 났고 찬물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게으른 내가 자주 하는 일은 아니지만 대파를 잔뜩 썰 때마다 시어머니가 생각난다. 시골에서 가져온 햇대파 서너 단을 며느리 자는 새벽에 일어나 혼자 다 썰어 놓은 어머님. 고맙기도 했지만 눈 뜨자마자 온 집에 퍼져있는 파 냄새가 싫었고, 쉬기만 하시라 했는데 굳이 이렇게 일하시는 것도 부담스러웠던 신혼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눈이 얼마나 따갑고 시큰거렸을까.
꼭 겪어봐야 아냐고 하지만, 경험 없이는 절절하게 공감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대파 말고도 많이.


#4. 노이로제
아이의 시력이 0.1 가까이 떨어져 안경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0.6에서 이렇게나 금방 떨어지나, 이제 마스크 쓰기 불편해서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길게 하기도 전에 우리 부부는 동시에 말했다.
"애들 또 줄줄이 자기도 한 번 써보겠다고 자기도 안경 사달라고 난리 치겠는데 어떡해??!!"
"그러게. 보안경이나 선글라스 같은 거라도 사줘야 하나?? 어떡해??"
"나도 쓰고 싶네, 왜 형만 쓰네 어쩌네, 나도 눈 나빠질래 어쩌네, 안경 타령 며칠 들어야 돼??"
정상은 아닌듯한 우리 부부. 삼형제의 나도 할래 타령과 개싸움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노이로제가 이렇게나 무섭다.


#5. 4월
뜨개질에 빠진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생각해보니 최근 몇 년 4월마다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꾸 뭘 시작했다. 2018년 4월에는 리본 머리핀에 손을 댔다. 2019년 4월에는 새로운 글쓰기 강의를 신청하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2020년 4월에는 코바늘 뜨개질에 빠져서는 사부작 사부작 뭔가를 만들고 있다.
내적 소용돌이 주기가 1년인 건가. 아니면 봄을 타는 건가!! 2021년 4월엔 에코백에 프랑스 자수를 놓고 있으려나. 프리즈마 색연필이나 아크릴 물감 같은 걸 잔뜩 사서 그림에 도전해보고 있으려나. 궁금하다.


#6. 울 일
"야. 이게 울 일이니?"
울 일이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건 당사자인데 나는 자꾸 아이가 되도 않는 일에 우는 것 같아서 울 일 아니라는 말을 내뱉는다. 어렸을 때 제일 듣기 싫었던 말 중 하나인데. 정말 울 일 아닌 것에 우는 소심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울고 싶으니까 울지!! 왜!!!" 하고 말대꾸도 하지 못했다. 뻑하면 우냐, 툭하면 우냐, 울 일도 참 많다며 비꼬는 이런 류의 말들이 정말 싫었는데. 엄마가 되고 아이의 울 일을 내 멋대로 판단하고 있다.


#7. 라떼
커피머신으로 내린 라떼가 우리 부부 앞에 한 잔씩 놓여있다. 라디오에서는 쇼팽의 화려한 대왈츠가 흘러나온다.
"나 피아노 열심히 배우던 때는 저것도 칠 수 있었는데."
"훗. 나도 540도 발차기하던 때가 있었거든?"
갑분태권도... 라떼를 마시면서 쓸 데 없는 latte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다.


#8. 드라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을 차례대로 닦아주었다. 1단계. 마른 수건을 양손에 잡고 성의 없이 젖은 머리를 부비부비 비벼준다. 그나마도 잘 안 해주는 2단계. 오른손에 드라이기를 쥐고 왼손 다섯 손가락으로 아이 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두피 쓸듯이 빗처럼 사용한다. 다시 위에서 아래로 정돈해주는 것까지 한 아이당 30초 정도 투자해준다.
"캬.. 아들 머리 말리기 진짜 세상 편하다. 딸들이었어 봐. 와 진짜. 난 못해 크크크크크큭큭크그그그그"
밖에 나가면 아들로서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만난다고 한탄하더니, 정작 애미는 아들이어서 좋은 진심의 이유를 애들 앞에서 말한 적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아들 최고^^ 하는 순간이 고작 머리 드라이 해줄 때라니... 자괴감이 들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이유다.




허리랑 바꾼 바지락



하루 한 장면 시리즈 <1>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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