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때때로 나에게 보였던 무뚝뚝한 인사나 냉담해 보이는 태도는 나를 멀리하려는 불쾌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자신은 가까이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니 그만두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정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다른 사람을 경멸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경멸한 것으로 보인다.(마음 / 나쓰메 소세키 / p17 / 보물창고)
스스로를 단죄하고
이런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이 경멸하기 전에 먼저 경멸해 버리고,
미리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버리고,
자신은 가까이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니 그만두라고 경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사람을 끝내 실망시켜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의 아저씨>에서 도망치는 지안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아저씨가 해주고 싶었던 말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지안을 도망치게 만들었던 건, 자신의 행위를 참을 수 없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테니까.
어린 시절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안은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어
자신이 과거에 그의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광일'의 폭력까지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해도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그저 견딜 수밖에 없었을 거다.
오히려 그렇게 학대받아야만, 몸은 아파도 마음은 조금이라도 속죄한 것 같은 기분으로 잠시나마 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조차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의 잘못을
아저씨 동훈은 다 알게 되고 나서도
지안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그렇게 지안은 눈물을 흘리고, 죽음과 비슷한 아픔을 통과해
결국 그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와 회복되어 부활한 것처럼.
'자살'하지 않고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선생에게도
아저씨와 같은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더라면, 알려줬더라면
자살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벌'에 해당하는 '유형생활'을 통해 죄를 사면받은 것이 아니라
소냐의 '사랑'으로부터 구원받고 '부활'한 것 같은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처럼.
이래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나 또한 온갖 형편없는 모습을 다 보인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헤맸었던 것은 아닐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나는 더 형편 없어졌었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절대적 사랑'을 찾아 헤매느라고.
결국 그건
나 자신에게서는...
잘못 해석하고 왜곡되어 비뚤어져버린 자기기만이고 변명일 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에서
'괜찮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더라면,
선생님은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이후...
정말로 괜찮았을까...
다시 삶은 형편없이 전락해 버리고
괜찮은 것처럼 잠깐의 갱생의 기회를 얻어 '다시 살게' 되었지만, 결국은...
같은 순환을 반복하며
이제는 그 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을 수없이 반복해 이르게 된
'허무주의'였을지도...
본인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이기주의일 뿐이었는지도...
스스로가
소냐가 되기를, 아저씨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바랬던 이기주의...
관념으로만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근대의 인간형'에 매몰되어 선생은 결국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세키는 '자살'밖에 출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자살'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편지를 남겨놓아, 근대의 인간형이 외롭게 살다가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해 '구원'의 가능성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게 되는 '선생'의 본보기를 통해,
교훈을 얻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 아닐까.
하지만, 자신을 반면교사로 삼도록 죽은 이후에 그런 편지를 남길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괜찮다'는 위로를 받아 죽음과 같았던 삶에서 다시 새로운 삶,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고 말하는 그 새로운 삶, 생명을 부여받아, 부활한 인간이 되어...
'나'에게 자신의 죽음으로서 교훈을 줄 것이 아니라...
선생 스스로가 '사랑하는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후계동', '정희네'와 같은 그런 곳이 되어,
타인에게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 주어 누군가를 '찰나'일뿐이라 하더라도...
살아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생이 다 할 때까지...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하여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소세키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런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잠시동안 그런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다시 회의감이 엄습하여...
마찬가지로 결론은 '허무주의'에 도달해,
똑같은 죽음의 결론밖에
답이 없다고 느꼈을까...
*나쓰메 소세키 책 독서 토론 후 카톡에 공유된 인용문과 그 밑에 적었던 글 (2025. 1. 24)
저는 그 대상이 동성에게 향하든 이성에게 향하든... '나'의 이끌림이 상대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되고... 그런 구원은 대상에 다가가고 가까워짐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선생이 회의적이었던 것 아닐까 생각했어요.
남녀 성별을 떠나 저런 감정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이 많이 되어서... 어려서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부분...
'구원'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 대상이 이성에게든, 선생에게든 향하는 것 아닐까...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은 마음, 결핍된 것을 채우고자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는 것이 사랑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그 누구도 구원자가 될 수 없고... 선생 자신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받을 수 없어 결국 자살할 수밖에 없었지만, 선생이 마음을 털어놓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소냐를 통해 라스콜리니코프가 부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처럼... 소세키가 '자살해야만 하는가?'라는 카뮈의 문제의식에 실존주의자들의 결론처럼 자살에 이르기보다... 소세키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다른 가능성, 다른 대답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가둔 벽, 감옥 속에서 선생은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가 선생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고 실망하게 되는 것은 자명할 테지만...
보봐리 부인이 결국 어떤 이성을 통해서도 구원받지 못하고 자살에 이르듯이요...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죽은 것 같은 삶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 같은 삶을 위해서 소냐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런 '온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마음>에서의 사랑은 '소유'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사랑'은 인간을 결코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선생의 결혼 자체가 선생을 구원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을 테고....
거창한 구원자, 사랑 보다... 선생에게 필요한 건.... '괜찮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위로가 아니었을지... 하지만 선생은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기에 구원의 가능성조차 차단될 수밖에 없었던 건 현대 사회의 특성 때문인 듯도 하고 소세키도 그걸 비판한 것 같기도 해요.
K에게도 여러 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결국 잃어버리고 마는... 근대 인간의 성향을 비판하고 '나'에게 교훈을 주는 것 아닐지...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계속 생각나는데... 아저씨가 도망치려는 지안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해주고 싶었던 한 마디 말이 '괜찮다'는 말이었거든요...
자신을 정죄하고 부끄러워 도망치고 숨고 싶었던 지안은 점점 '살게'되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와 환타지에만 존재할 것 같은 옛날 동네 '후계동' 아저씨들, '정희네'... 이런 것들, 그런 온기가 죽어있던 지안을 조금씩 살아나게 했던 것 같고요...
그런 것들이 없었더라면 지안(아이유)도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거나(선생이 살았어도 죽은 것처럼 살아왔던 세월처럼) 극단적으로는 자살에 이르렀겠죠...
저도 소세키가 이른 결론, 해답이 '자살'이라고 오해한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소세키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다른 결론에 이르렀을까 생각했던 의문도 저의 오해였을 것 같기도 하고...
'자살'이 답이라는 걸 보여준 게 아니라
그저 소세키는 '자살'로 마감한 근대인의 모습을 단지 보여주고 '나'가 교훈을 얻고 독자도 교훈을 얻어 좀 더 살아있는 삶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숙고해 보도록 유도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