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이세라 Nov 06. 2023

고향


연주가 딱 2주 남았다.
주말마다 훌쩍 떠났던 시간 여행이 끝나간다는 뜻이다.
다음 주는 평일 연습밖에 없고, 그다음 주 토요일이 연주니까 연습 때 참여하던 뒤풀이는 어제가 거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고량주를 처음으로 마셔보았는데 첫 모금에 목이 뜨거워졌다. 
소주잔보다도 작은 잔으로, 한 모금씩 털어 넣으니 나도 모르게 금방 취했나 보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화장실을 가려고 하니 몸이 비틀거렸다.
고량주는 숙취가 없다고 하더니 정말인 것 같다.  그 정도 비틀거릴 정도로 마셨으면 오늘 괴로워하며 다시는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후회했어야 했을 텐데, 어제의 과음에 대해서 몸으로는 벌 받지 않았고, 기분도 나쁘지 않다.  과거에 술 먹은 다음날 기분이 나빴던 것은 숙취에 괴로워하는 몸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고량주 한 모금씩에 더 먼 과거로 성큼 이동했다.
이동해 갔던 바로 그곳이 나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서로 시끄럽다고 구박하는 와중에 추억들이 오고 갔다.
내가 악장이었던 대학 4학년 봄 연주 때에는 지방 연주도 있었다. 
지방 연주는 대구, 부산에서 있었던 것 같은데 악장이었던 때가 부산이었었나?
지방 연주에 함께 갔던 클라리넷 하는 선배가 뒤풀이 때마다 그때 이야기를 해주신다. 아.. 맞아... 서클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공연도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테너 박인수 씨가 성악곡을 함께 연주했었다. 곡은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중 '그대의 찬손',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 성악가가 '내 이름은 미미'와 나비부인 중 '어떤 개인날'을 연주했다. 바이올린 솔로 부분이 있었고, 악장 솔로인데 잘 못해서 민폐스럽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자신감 없이 찌그러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제 선배님은 내 이야기가 또 화제에 올랐을 때, "그때 박인수 씨가 얘 좋아했었다"고 옆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거다. '설마요'라고 속으로 대답하며 쫑긋하려는 귀를 내리고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나에게서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당시 형편없는 악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성악가마저 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장이었더라도 스스로는 존재감 없이 그 시절을 견뎠던 것 같아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던 박인수 씨에게 '나'라는 사람은 인식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보통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와 악장이 악수를 하고 협연자와도 악수를 하는 것 같은데, 박인수 씨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았던 것 같았고, 왠지 오만해 보였고, 아마도 실력 없는 악장이라 무시하는 거 아닐까? 하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낮아진 자존감으로 스토리텔링되어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 진짜였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 당시 기억은 흐릿하다. 내 존재 자체가 흐릿해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 헤어지기는 했지만 사귀던 선배가 있었고, 다른 관계들은 단절되고 닫혀 버렸고, '마음'은 사라지고, 기억조차 흐릿해질 만큼... 그때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같이 연주했던 사람들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서곡이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였고, 앵콜곡으로 '백조의 호수'를 내가 추천했었는데 앵콜곡 선곡이 좋았다고 칭찬받았던 기억...
백조의 호수의 오보에 선율과, 내 이름은 미미, 어떤 개인날의 바이올린 솔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기억을 선율 속에 실어 가끔씩 생각나게 해 줄 뿐이었다. 
나는 너무 많이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도 선배님들이 옛날 모습이랑 똑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다.
나는 그렇게도 열심히 책을 읽으며, 책 속 생각들로 나를 채워,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는데...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몸짓과 행동들은 예전과 똑같은 모양이다. 
좋아해야 할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고향에 돌아갈 때는 누구나 성공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백 프로 몰입했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아직도 전업 주부인 내가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고향에 돌아갈 때는 사실 이런 모습 그대로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들이 현재 성공했는지의 여부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내가 그들의 기억 속에 각자에게 비친 영상 속 모습으로 담겨 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사회적 위치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다 귀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만 희미하게 있던 모습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나 내 옆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신기하다.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모습들이 감사할 일이기도 한 것은... 이제는 기억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영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음악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람이 있었고, 인생이 있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밖에서는 찾기 힘든...  돈도 되지 않는 음악을 사랑하며 함께 모인 아마추어 음악인들, 같은 마음으로 모여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고향을 찾아왔어야 했던 거였다. 내가 찾는 사람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리운 그 사람들이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지금 뭐 해?'라는 질문은 어쩔 수 없이 오고 가고... 
'지금까지 아이만 키웠어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의아한 듯 바라보는 시선도 있긴 했다.  내 주변에는 나처럼 아이만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주에는 삼송역에서부터 창릉천 길로 걸어오다가,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벤치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해 보았다. 탁 트인 하늘 아래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연주회장에서 프로그램에 따라 연주되는 음악보다... 그런 날것의 음악... 충동적인 연주... 의외의 순간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예전에 후배가 기억하는 내 모습 중에 뒤풀이 끝나고 같이 제기동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내가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했다고 하는 모습이 있었다. 사실 내 기억에서는 사라졌지만... 과거의 모습들 중 내가 사랑스럽게 여기는 내 모습은 그런 모습들인 것 같다.  그런 충동들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억압해 왔었는데, 술이 취했을 때 조금 용감해졌었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더 무모하고, 조금 더 용감하지 못했던 게 아쉬울 뿐인데...
어제는 이번에 함께 연주하는 성악가가 처음으로 연습에 참여한 날이고, 뒤풀이에서도 끝까지 함께 했다. 깊은 발성은 노래할 때뿐 아니라 대화를 할 때도 여전해,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 음성은 또렷이 드러났다. 
옆모습을 보니 예전에 술 먹다가 새벽에 예술의 전당 계단에서 노래를 한 곡씩 돌아가며 불렀을 때,  <명태>를 불러 기억에 남았던 사람과 닮은 듯하다. 유튜브 영상에서 <명태>를 불렀던 외국인 성악가와도 닮은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명태>를 불러달라고 요청해보고 싶었다.
지하철 방향이 같은 선배가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취해서 바로 옆에 예술의 전당이 있으니 과거를 재현하듯 우르르 몰려가자고 선동하여, 계단에 앉아 노래를 청했을지도...
그러한 '낭만'은 젊은이들만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인 걸까?
어제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순수하고 귀여웠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근엄한 모습으로 점잖게 앉아 있어야만 했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었던 거다. 하지만 어제는 다들 행복해 보였고 모두들 즐거웠다.
그래... 그러다가 언젠가는 또 이별이, 슬픔이 찾아올 테지만... 
잃어버려야 할 그것이기에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는 순간들인 거다. 
본분을 잊은 주책이 아니라...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런 곳인 듯하다. 
나를 훌쩍 그 시절로 데려다주고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





글 옵션          




최고예요1


작가의 이전글 공동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