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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Dec 04. 2023

지난 1년 내가 제일 잘한 것


5월에 삼송도서관에서 70대의 시니어 모델 윤영주의 강의를 들었다. 

60대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제는 몸으로 하는 걸 해보고 싶어 시니어 모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글자 속에만 푹 파묻혀 정작 삶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하던 중이라 그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양시 독서대전 프로그램으로 ‘런웨이’라는 색다른 수업이 도서관 공지에 올라왔을 때, 평소 같았으면 바로 시선을 돌렸겠지만, 무심코 알람을 해 두었다가, 알람이 울려서 신청까지 하게 되었다.

무대에는 올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자세와 워킹은 배워서 교정받고 싶었다.

무대까지 갈 수 있을지는 지금 당장이야 물론 자신 없고 싫었지만 그건 배우기 전의 나의 짐작일 뿐이고, 배우고 난 이후, 미래의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거라, 미리 못할 거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스스로 정해놓은 좁은 한계 속에 안주하며,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며...     


일단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갖고 첫 수업에 참여했다.

워낙 도서관 수업에 단련이 되어 있어, 타이틀은 ‘런웨이’지만 그래도 도서관 수업이니까 익숙한 마음이었다.

게다가... 뒷자리에 살짝 앉으려는데... 맨 앞자리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는 얼굴이 두 명 눈에 띄는 거다. 

글모임을 같이 하는 보승님과 당시 이런저런 수업에서 자주 뵈어 인사까지 나누었던 진순님이었다. 아는 분들을 만나니까 없던 자신감이 조금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다들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모두들 당당하고, 유머 넘치고, 첫 만남이라 최대한 자제했을 텐데도 어찌할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끼’가 엿보였다. 그리고 점점 알게 된 사실은 나와 같은 초보는 도서관을 통해 정보를 접한 보승님과 진순님을 포함한 몇몇 분들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전에 비슷한 행사를 해서 이미 서로 친하고, 연륜과 경험이 있는 경력자들이었다는 거다. 어쩐지, 패션부터 달라 외모에서 이미 나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 자신감이 생겨나려다가, 점점 ‘현타’가 왔다.

아... 역시 나 같은 사람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걸까 싶었다. 

정신없이 육아에만 전념하다 코로나 이후로 독서모임을 시작하며 책 읽는 사람들 틈에도 어렵게 적응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려고 하니 낯설음과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독서모임에서조차도 에너지가 높은 사람들에게는 약간 적응이 안 되고 있던 상황이라...     

낯설음을 극복하고 이 분위기에 애써 섞여드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독서모임 어느 분은 런웨이 수업에 가기 전에 갈등하는 내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왜 굳이 자신을 바꾸려 하느냐고 조언했고, 그 말은 달콤한 유혹처럼 이전 것들에 안주하고 싶게 만들며 내면에서 ‘회의감’이라는 모습으로 수시로 올라와 계속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매일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그전에 도저히 하지 못했을 것 같았던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덤덤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수업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낯설었던 분위기는 점차 익숙해지고, 그 분위기의 매력에도 점점 빠져들었다. ‘시니어’들의 매력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워킹 외에도 ‘명작 동창회’라는 짧은 연극과 댄스까지 공연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연극도, 댄스도 어떻게 피해 갈까만 궁리하며 정 못하겠으면 그때 포기하고 일단은 가보자는 마음으로 수업에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즉흥 연기에서 충분히 ‘연기력 없음’은 증명되었을 텐데도 쟁쟁한 연기자분들을 제치고 소심한 나에게까지 배역이 주어진 거다. 

‘심청이’

프로그램에 처음 참여하는 분들에게 기회를 더 주고자 하는 주최 측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내 캐릭터를 파악하고 배려하여 주어진 배역이라 크게 어려운 대사는 없었고, 분량도 많지 않아 적당한 때에 도망가려던 나는 점점 대사를 하나씩 읊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폐를 끼치지 않고 적당한 타이밍에 빠질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어느 순간 즐기고 있었고,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지고 정이 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가고, 공연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고 연연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독이며, 매일의 수업들에만 일단 충실하게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무대에 올라가게 되었고, 공연까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처음의 소심했던 마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한데... 아무래도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좋은 기운과 에너지의 힘으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가능성 때문인 것 같다.

새로운 걸 배우고 익혀서 잘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힘으로 끝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염두에 두지 못했던 거다.      


런웨이 수업을 통해서 뜻하지 않게 발견하고 배운 건, 원래의 목적이었던 자세와 워킹, 연기였다기 보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매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원숙해져서 젊음의 아름다움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에너지는 나에게도 흘러들어와 나의 일부에도 섞여 마치 복사되듯이... 나 자신도 그전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9월에 독서대전 행사였던 런웨이가 끝나자마자, 11월에 있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공연을 위한 연습에 합류하여, 15년 만에 악기를 다시 잡고, 얼마 전에는 연주회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나를 바꾸기 위해 용기를 냈던 런웨이 과정을 통해 얻은 에너지와 사랑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고, 그 과정은 글쓰기를 통해 이전에 이미 뿌려졌던 씨앗에 물을 주고 햇빛을 쬔 일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발아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하고 뿌려졌던 씨앗에서 나도 모르게 싹이 트고 자라나 잎이 되어 광합성을 하고 꽃까지 피우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꽃이 피고 지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다시 발견하고 배우게 된 사실은... ‘꽃’이 문제가 아니라...  꽃을 피우기까지 수고한 그 모든 것들... 그 가운데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잃어버렸던 음악을 찾으러 간다고만 생각했던 연주회 과정에서도 잊고 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이 음악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으니까...     


지난 1년 내가 제일 잘한 것은 결국 ‘사람들’을 향해 따뜻한 마음이 회복되어 가는 ‘시선의  재발견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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