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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Dec 23. 2023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마음속에 무언가 계획을 세워놓았을 때 예상대로 되지 않는 일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이상적인 상황을 완벽하게 그려놓을수록, 그것과 어긋나는 걸 참을 수 없다. 

이 모든 이유가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동안 가장 노력해 왔던 부분이 ‘집착’에서 벗어나기, 마음을 내려놓기였다.

약속을 정하면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단 몇 분의 오차에도 화가 나고 힘들어할 정도였다. 그래서 약속하는 것조차도 싫어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도 힘들었고,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도 관대해지기가 어려웠다. 관계 속에서 불필요한 마음들이 생기는 게 싫어 관계의 가능성의 많은 부분들까지도 아예 미리 차단하고 포기해버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나 스스로 대견하게 여길 때를 돌아보면, 계획된 일정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초연할 때이다. 그전의 나였더라면 발을 동동 구르고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몰입하여 성격마저 포악해져 버렸을 거니까.

“생각한 대로 되어야 한다”는 모든 생각이 집착인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있는 독서 모임은 3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데, 나는 오늘 거의 처음으로 책을 완독 하지 못했을뿐더러 책을 구하지도 못했다.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것은 기본이고, 완독 하는 것도 당연히 기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성실한 아침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를 대견하게 생각한다. 

성실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조금은 관대해질 것을 나 자신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성실하지 못하면서도 뻔뻔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상대방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염려까지도,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 모든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면, 모든 날이 짐처럼 여겨지고 버거워질 것이다.

사실 독서 모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마음이 가능해서, 큰 부담 없이 많은 모임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꼭 참석해야만 하는 상황, 꼭 지켜야만 하는 의무가 된다면, 그때부터 마음은 무거워진다. 독서 모임들에 대해서까지도 그런 무거운 마음이 들었더라면 나는 단 하나의 모임조차도 오래 유지해 오기 어려웠을 거다. 

그런 의무 없이도 나는 거의 모든 모임을 빠지지 않을 만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적으로도 크기 때문에, 공식적인 의무가 되어버리면 혹시라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생겨버릴지 모르는 가능성에 대해 미리 본능적으로 과도하게 긴장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돈’ 받고 해야 하는 ‘일’은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의 해결책은 ‘직면해서 극복하기’가 아니라 ‘최대한 그런 상황은 회피하기’ 였었나 보다.     


최근에 그림 관련 수업을 들었다.

자유롭게 그려도 되는 그림조차, 실재와 가깝게 그리려고 애쓰며 수없이 지우고 다시 그리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지울 수 없는 팬 그림은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아예 그리지 않는 쪽 세계에서만 살아왔던 것 같다.

종이 하나만 사용하여 처음부터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있었던 건데, 그림 수업을 통해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종이는 무한히 사용 가능하며, 그림에서도 틀리는 것이란 없고, 설사 틀리더라도 다시 그리면 된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틀리는’ 것은 누가 판단한다는 것이란 말인가, 시험에 붙고 떨어질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수없이 많은 종이를 낭비해 가며 나도 모르게 점점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게 될 수도 있을 텐데, 처음 직면한 종이에서조차 완벽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 자체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번 글쓰기 수업 과제 공지를 보며 마음속 어딘가가 불편했다. 왜 그런지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첨삭’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 수업을 몇 번 경험한 이후

나는 잘 쓰기 위해 글을 쓴다기보다, 소통하기 위해 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구를 위한 ‘잘 쓰기’인가? 책을 내기 위해? 책이 많은 독자에게 인정받고 잘 팔리기 위해?

그렇다면 현대 독자들의 구미에 맞도록 나를 꾸며야 할 일일 것이다.

나는 수없이 많은 지면을 낭비해 가며, 어쩌면 잘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애초부터 잘 쓰기 위해, 첨삭받기 위해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잘 쓴다’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에, 어느 한 사람의 기준에서 평가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기꺼이 그 조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함부로 평가되고 첨삭된 나의 글은 그렇게 ‘박제’가 되어버릴 수 있다. 글에는 ‘생명’이 있을 터인데, 박제된 나의 글은 ‘생명력’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

첨삭되어 바뀐 글은 나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아직은 어설픈 글 자체가 ‘나’ 일 것이기 때문에...

첨삭받아 완벽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자체부터가 집착이라고 생각된다.

글쓰기 수업에서는 ‘잘 쓰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수없이 말하지만 왜 ‘첨삭’을 하는 모순된 일이 있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조차 ‘글쓰기 수업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나의 ‘집착’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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