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이세라 Jan 06. 2024

선물에 대한 상념

나는 어쩌면 물질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 '마음'만이 움직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움직이는데 '형식', '물질' 등은 오직 방해되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 같다. 순수한 마음을 위하여 '물질'이 영향을 주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에도.... 그래서 심한 결벽증이 있었나 보다.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한 결벽증이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선물'이라는 '물질'이 매개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런 방해물, 또는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요인 없이 순수하게 마음이 마음에게 가 닿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도 너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선물에 대해 냉소적인, 삭막한 마음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어차피 닿지 않을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선물'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어차피 닿을 마음이라면 '선물'이라는 물질적 수단 없이 마음은 가 닿을 것이라 여겼는지도...

나의 마음을 전하고 상대의 마음에 가 닿도록 하기 위해 '선물'이라는 물질적 수단이 꼭 필요한 것일까 싶고,  순수한 마음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방해물'이라고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선물'이라는 것의 목적에 사실은, 뇌물적인 요소도 있고,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도 있고, 순수한 마음뿐이더라도... 그 마음을 물질로 대신 전하고자 하는 목적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만나고, 마음과 마음은 자연스럽게 전달되고 오가기를... 아무것에도 방해받거나 교란되거나 혼란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오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선물'을 받으면 순수하게 기뻐하지만 못하는 내 마음이 문제일지 모르지만, 이런 반응의 사람이 오직 나뿐인 것은 아닐 테니....


'선물'의 목적이 그런 부정적 요소 없이 단순히 성의 있는 마음일 뿐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은 '전해지는 그 마음'에 기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복잡해진다.

일단 선물을 받으면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압도한다. 나는 똑같이 챙기지 못했을 경우 '미안함'과, 센스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따라서 올라온다. 내가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자격이 없는 것 같은 '황송한 마음'도 생긴다. 그리고 다음에는 나도 이렇게 센스 있게 선물하고, 이 고마움을 갚아야 할 텐데 하는 '부채감'이 생긴다. 갚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죄의식'이 생겨나고,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생겨난다. 심하게는 상대방에 대하여 원치 않는 빚을 지게 해서 나를 빚더미에 올라앉게 만든 것 같은 '분노감'이 생길 수도 있다. 주는 마음만큼 되돌려 받지 못한 상대방이 이제는 나를 점점 원망하고 미워할 것 같다는 '망상'? 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나에게 보이는 '행동'들에서 그런 '마음의 표현들'을 읽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서먹함'이 생겨나기도 한다.

순수하게 주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 그만큼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 변질되어 갔던 나의 예전 경험과 그때의 나의 마음이 오버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경우 나의 '선물들'은 일방적이었고, 어떤 형태로든 '보답'을 바라지 않았나 하는 '교환의 심리'가 전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성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얻게 된다면, 움직인 그 '마음'은 '선물'에 이끌려 상대의 '마음'에 이끌린 거라 선물의 역할은 긍정적이라고 할만한 걸까? 선물에 움직인 그 '마음'은 그 마음대로 '진실'에 가까운 마음일까, 혹시 '마음'이 그 '마음'이 진실이라고 '착각'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움직이고 형성된 마음이라 하더라도 마음은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이 어차피 어떻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일 거다.


그래도... 어차피 모든 것은 변하고 마음조차 변한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물질에 영향받지 않는 '순수한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물질이나 형식에 방해받지 않고, 내 마음이 흐르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선물'이나 '형식'들은 매번 순간순간의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러한 마음의 휩쓸림이 싫어서, '선물'이라는 것이 불편해지고 이제는 더욱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는 '물질적 요인'이 되어버려서....


어느 단체에 있을 때 '선물'을 유난히 잘하는 회원은 나머지 회원의 '환심'을 살 테고, 주고 싶은 넉넉한 마음, 세심한 마음에 감사하지만, 선물의 목적에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면... '선물'에 좌지우지되어 '환심'을 주고 싶지는 않다는 고집이 생기며 오히려 상대에게 닿으려는 나의 '마음'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선물'로 인해 나에게 올 수 있었던 다른 사람의 마음이 가로 차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선물을 주고받으며 순수하게 마음을 주고받고 기뻐하는 그들 사이에서 잘 챙기지 못하는 나는 점점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받기만 하는 얌체가 되어버린 나는 그 '선물' 자체에서도 점점 소외될 것이기에...

그러다가 결국 내 마음 자체도 '의기소침'해질 것이기에...

그 순환이 두려워 내가 '선물'을 주섬주섬 챙긴다면... 선물에 담긴 나의 '마음'이 과연 무엇일까 의심이 생기기에 나는 더욱 선물을 챙기지 못할 것이고... 선물을 주고받는 그 모임에서는 더욱 소외될 것이기에....


'선물'이 마음을 전하는 수단이고,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문화 속에서라면... '마음' 없이 '돈'으로 선물을 준비할 수 있는 '부자들'이 더욱 '마음'을 얻기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반감도 있다.


전두환이 호인으로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샀던 것에는 넉넉하게 베풀 수 있는 재력이 바탕이 되었을 수 있을 테니...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넘치며 더욱 충성하지 않았을까....


'선물'을 가장 좋아하는 건 또한 '자본주의'일 것이기에...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만이 가치가 있어 보이고, 비싼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바쳐 만든 어떤 작품은 선물이 되기에 초라해 보이고, 오히려 그런 선물을 한 사람은 주지 않은 것만 못한 '욕'까지도 먹게 되는 경우를 보면서... '선물'에 대한 상념은 끝없이 계속되고, 선물의 본질보다 적어도 욕먹지 않을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에 머리가 아파지는 나는 이 때문에도, 더 이상 순수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선물을 챙겨야 하는 것이 때 되면 해야 하는 '형식'처럼 변질되어 빈 손으로 가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갑자기 마음이 부산스러워지고... 만남의 기쁨보다, 빈손으로 가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강박과 뭘 준비해야 하지 하는 고민에 선물하는 기쁨, 만남에 대한 기대감보다 부담감이 더 커져버린다면... 그런 '선물'이야말로 '마음'을 억누르고 방해하는 요인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일 테니.... 이런 상념에 지쳐서 선물을 결국 준비하지 못하게 되는 나는 점점 빈 손으로 '마음'만 가지고 가는 뻔뻔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또한 '선물'에 대해 긍정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부정적인 영향력일 수 있을 거다.


사실 이 모든 변명들에는 나의 자격지심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넉넉한 재력으로 매번 별다른 고민 없이 선물을 골라 모두가 기뻐할만한 선물을 들고 갈 수 있다면 모두 다 쓸데없고 머리 아픈 생각일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형편에 맞는 작은 선물이라도 성의를 표하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누군가는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성의를 표하는 그 마음만이 중요한' 그런 선물을 하고 있는 걸까?

크든 적든 어쨌든 우리는 선물로 그 성의를 표해야만 하는 걸까?


'선물'을 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은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아마 유리한 입장일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물론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 사람은 없다고 하겠지만,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라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선물'에 대해 생각하거나 바쳐야 하는 '에너지'는 다를 것이다.


'선물'을 받는 기쁨도 어려서부터 배워야 아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순수한 '받는 기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기쁘지 않으니 나의 선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더욱 그런 기쁨을 준다기보다, 선물은 챙겨야 하는 '의무'로만 더욱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선물'을 챙기는 것이 습관이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가볍게 손에 들고 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온 마음을 바쳐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골라야만 할 것 같은 너무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형편이 넉넉하다면 '가격'에 대해 생각하는 '에너지'도 별로 크지 않겠지만, 가계부를 써야 하는 입장이라면 '금전적인 면'까지 생각할 게 많다. 그러다 보면 선물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보다 무슨 선물을 골라야 하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 결정해야 하는 '부담'이 마음보다 더욱 커져버린다.

그런 부가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선물'이라면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생각에 아예 선물 제도 없이 오직 사람과 사람의 마음만 기쁘게 만나고 싶을 뿐인 거다.


더구나 누구에게는 선물하고, 누구에게는 선물하지 않을지 결정하고 구분 짓기까지 해야만 한다면... 선물 받지 못하는 사람의 상처까지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특정한 누구만을 골라서 선물할 수도 없고, 모두에게 다 선물할 만한 경제력도 더더욱 없다.

'전두환'은 그런 걱정 없이 '모두에게 다 선물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었으니 아무 걱정 없이 선물하고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을 거다. 결국 '선물'도 가진 자에게 더욱 유리한 '물질'로만 느껴져서 이 모든 것에 다 '저항'하고 싶어지는 거다.


선물하고 싶지만 선물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그 마음도 배려하고 싶다. 전두환만큼의 재력이 '선물'이라는 이유 때문에라도 부러워해야 한다면... 나는 '선물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남들처럼 선물하지 못하며 슬퍼하는 그 모든 마음들을 위로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데 하물며 나는 버젓이 '선물'을 하는 재력과 넉넉한 마음과 정성과 세심함을 갖추었다는 듯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선물'을 보란 듯이 뿌리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얼마든지 재력과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선물하지 못하는 다른 여러 가지 사정과 마음들에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는 건 '오버'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나는 매번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기 때문에 더욱 피곤하고 '그까짓 선물 하나'에도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선물하는 사람은 후덕하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으로, 선물하지 못하는 사람은 삭막하고 각박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 같은 이분법적 잣대도 싫고, 선물의 능력은 마음의 능력보다 경제적 능력을 가진 자가 유리할 것이라는 점도 마음에 안 들고(당장 생계부터 걱정해야 한다면 마음이 아무리 있더라도 선물을 더욱 챙길 수 없을 테니)  , '선물'이 오가는 사회를 그 누구보다 '자본주의 세계'가 마음에 들어 하고 부추길 것 같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안 들어 괜히 더 저항하고 싶어 진다.

작가의 이전글 도서관 수업, 독서 모임 회고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