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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Jun 16. 2024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필사 부분 단상  

"악수를 하는 그들의 손은 매우 축축했으며 정원 문의 녹이 묻어나 있었다. 그러나 한스가 토니오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한스의 귀여운 얼굴에는 후회하는 것 같은 그 어떤 기색이 나타났다.

<참, 말이 났으니 말인데, 다음번에는 나도 <돈 카를로스>를 읽어볼게!> 하고 그는 재빨리 말했다. <밀실에서 우는 그 왕 이야기는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자기의 가방을 팔 밑에 꼈다. 그러고는 앞마당을 통해 달려들어갔다. 집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니오 크뢰거는 마음이 아주 밝아져서 날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거기를 떠나갔다. 바람이 그를 뒤에서 밀어주긴 했지만, 그가 그다지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한스는 <돈 카를로스>를 읽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 둘은 이머탈이나 다른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그 어떤 공동의 화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 둘은 얼마나 서로 잘 이해하게 될 것인가! 누가 아는가, 혹시 한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시를 쓰게까지 될 수 있을지! 아니, 아니야, 그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한스는 토니오처럼 되어서는 안 되며, 지금 상태 그대로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사랑하고 토니오가 가장 사랑하는 바로 그 밝고 씩씩한 한스로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스가 <돈 카를로스>를 읽는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로울 건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토니오는 그 유서 깊은 땅딸막한 성문을 통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항구를 따라가다가 함각머리 지붕들이 늘어서 있는 그 가파르고 바람 불며 축축한 골목길을 걸어 자기 양친의 저택이 있는 데까지 올라갔다. 그 당시 그의 심장은 살아 있었다. 그 속에는 동경이 숨 쉬고 있었으며, 또한, 우울한 질투과 극히 작은 경멸감, 그리고 순결하기 짝이 없는 행복감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 민음사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 느끼는 것은 흐릿한 세상인데… 순간에 고정시키는 힘. 그것의 명료함. 분명한 한 음을 누를 수 있는 힘. 1초의 시간을 수많은 시간으로 세분하여 그 순간순간들을 다 고정된 한 점들로 인식할 수 있는 힘. 희미하게 느끼는 세상이 아니라, 순간 많은 것을 고정된 인식으로 느낄 수 있는 힘.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잠드는 순간, 그 수백, 수천만 분의 일초의 그 순간을 인식하고 구별해 낼 수 있는 힘. 그 능력에서 초인적인 기술이 나올 테지. 순간들을 잡아낼 수 있는 힘. 흐르는 시간, 흐릿하게 퍼져 있는 것들을 흐린 채로, 변하는 채로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명료하게 붙잡는 힘. 

뉘앙스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뉘앙스들을 하나하나 언어로 고착해 낼 수 있는 힘. 구현해 낼 수 있는 힘. 


시공간은 빛의 속도로 결정되는 것. 하지만 시간이 멈춘 그 순간에는 공간이라는 개념조차 초월하여 아주 먼 곳까지 정보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멈춘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그 순간. 과거와 현재가 넘나들어 소통할 수도 있는 그 순간. 정지된 그 순간. 어떤 정보가 교환될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과거와 미래까지 중첩되어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는 그 순간. 

그 순간 동시성으로 일어나는 그 정보들이 교환되어 나에게 동시성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인지도. 비슷한 숫자들, 비슷한 언어들, 비슷한 상황들로… 


그래서 죽음으로 넘어간 저 세상의 영혼들이 장난치듯이, 멈춘 그 시간의 틈새들 사이들로 정보를 교환하여 현재들의 나의 시간들 속에 던져주고 있는 것 아닐까?

그게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일까? 

세상 인식의 방식이 인과론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넘어가면 그 세계를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동시성들로 나타나고… 


이런 식이라면…  로또번호도 맞출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202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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