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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Apr 13. 2024

니체 수업 후기 / 양과 맹수의 비유 / 토니오 크뢰거


얼마 전에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을 읽었을 때, 토니오가 오랫동안 중얼거리던  '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다는구나'라는 시구가 계속 마음에 남으면서, 예전에 읽었을 때는 전혀 인식되지 않던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넘어지는 막달레나 페어메렌같은 소녀…
소설의 마지막 무도회 장면에서 토니오 크뢰거 앞에서 엎어지는 여인도 막달레나로 추측이 되는데, 토니오는 막달레나에게 "아가씨, 이젠 춤을 그만 추시는 게 좋겠군요"라고 조언한다.

이 부분이, 니체 강의 4강 수업 때의 양과 맹수의 비유와 연관되어 계속 생각났다.

잠이 오는데 추어야 하는 춤… 그 시구를 떠올리면서 토니오는 "사랑하고 있는데 춤을 춰야 하는 굴욕적인 모순"이라고 덧붙인다.

양의 존재 방식과 일치하는 행위는 풀을 뜯는 것인데, 맹수처럼 고기를 뜯어야 하는 것 같은 상황이 잠이 오는데 추어야 하는 춤과 같은 경우일까?

한편으로는 2강에서 '그것이 생소할지라도 그 눈길과 표현을 참아내고',  '그것을 견뎌내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 '생소한 것에 대해 선의와 인내'를 베푼 보상, '우리의 친절에 대해 그것이 보내는 감사', 그리하여 '사랑도 배워야만 한다'는 점과 관련해서는… 그래서 양에게도 이처럼 생소한 고기를 견뎌내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생소한 것을 실험해 보고, 고기를 먹는 법도 참고 배워보고 실험해보아야 하는 것 아닌지, 그렇게 선의와 인내를 베풀다 보면 보상을 받게 되어, 생소한 것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의 존재 방식이 풀을 뜯는 것인 줄로만 알고 살아가던 양도, 결국 고기의 맛을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양은 사실 알고 보면 양으로 키워진 늑대였을 수도 있을 테니까...

혼동이 되는 이유는, 나는 결국 양이 맞기 때문에, 나의 존재 방식과 고기는 맞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실험해보지 않고, 익숙해지기까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기의 맛을 알게 되는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양인지, 양으로 키워진 늑대인지…  늑대라면 인내의 과정도 필요 없이 고기가 바로 맛있었을 테지만, 그 보상을 받기까지 견뎌내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결국 보상을 받지 못하고 마는 양이 맞는 것인지, 인내의 과정 후 고기의 맛을 깨닫게 되는 늑대일 수도 있는 것인지…

막달레나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계속 넘어지게 하는 춤이라면… 춤은 결국 막달레나의 존재 방식과 맞지 않는 게 분명해 보이니, "아가씨, 이제 춤은 그만 추시는 게 좋겠군요"라는 조언을 따라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잠을 자고 싶지만, 생소함을 참아내었을 때 그것에 친숙해지고 나중에는 춤을 사랑하게 될지 아닐지, 어떻게 미리 판단할 수 있을까. 결국 늑대가 아닌 양이었음이 밝혀질 수 있겠지만… 그전까지 모든 것을 다 실험해 보고 시도해 보고 인내해 보기 위해 춤을 더 인내하고 배웠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존재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과연 얼마큼 지속하고 노력하고 시도해 보고 견뎌낸 이후에 내려야 할지, 그래서 언제 늑대가 되기를 포기해야 할지 우리는 알 수 있을까.
늑대에게서 자란 양은, 아무리 배워도 고기를 먹지 못할 테지만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인내하는 것 아닌지...


명확하게 양과 늑대임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보다, 대부분은 양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런 경우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양인지 늑대인지 명확하다면 아무 문제도, 갈등도 없이 양은 풀을 뜯고 늑대는 고기를 뜯으면 될 일일 테지만, 고민의 대부분은 내가 양으로 자란 늑대인지 늑대로 자란 양인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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