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원 Jan 03. 2018

오늘 너를 사랑하지만, 내일이라도 헤어질 수 있어!


또 싸웠어...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절친 H가 결혼을 했다. 상대는 교회에서 만나 이 년쯤 사귄 동갑내기였다. H는 아주 긴 시간 상대를 짝사랑했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연애에 성공했고 결국 결혼에 이른 것이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H와 술을 한 잔 했다. 청첩장도 받고 잔뜩 축하를 해 줄 요량으로 만났는데 뜻밖에도 H의 표정이 어두웠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싸웠단다. 여기서 '또'가 중요하다.


둘은 연애 초반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년 내내 싸웠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모든 고통을 하나님이 주신 성장의 기회라고 받아들이는 H는 늘 먼저 양보하는 차분하고 순박한 아이였다. 반면 상대는 다소 자유분방하고 이기적인 편이어서 늘 H에게 자기에 대한 이해를 요구했다. 아마 이 정도였다면 H는 그걸 다름으로 인정하고 얼마든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H가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에 대해서도 보듬어주거나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날 싸운 이유도 비슷했다.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H는 지난주 내내 외근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외근 뒤 돌아와서 주어진 업무를 어찌 됐든 끝내 놓을 것을 요구했단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낮에는 추위에 시달리며 외근을 하고 밤에는 열두 시까지 야근을 했던 H는 결국 목요일 밤에 회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혼자 남아 일했던 까닭에 그가 쓰러진 것조차 아무도 몰랐다.


친구는 몇 시간 뒤 혼자 깨어나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자연스레 결혼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귀찮다는 듯이, 네가 체력관리를 잘못한 탓이라며 차가운 말들을 쏘아붙였다고 한다. 마음 여린 H는 많이 서러웠을 것이다. H는 이후 잠시 진지하게 이별을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체면이나 관성 같은 것들은 사랑의 유무보다 무거운 것이어서, 일주일 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에 골인하고 말았다.


체면 >> 사랑

당장 헤어져.


사실 나는 결혼 일주일 전의 그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둘은 확실히 치즈케이크와 된장찌개처럼 잘 안 맞는 한 쌍이었고 단 한 번의 쪽팔림으로 평생의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H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마 내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사실은 나도 똑같은 사랑을 했었다. 4년여를 사귀었던 여자 친구.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투쟁이었다. 그냥 넘어가는 일주일이 길다 싶을 만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싸웠나. 그래도 나는 늘 사람이 변화하리라 믿었다. 내가 그녀 쪽으로 가든, 그녀가 내 쪽으로 오든 우리의 다름이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거라 믿었다.



대학 때 잠시라도 학생운동에 발을 담갔던 이들은 아마 사람은 변화한다는 믿음을 마음 깊이 가지고 있으리라. 사회가 변하려면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 사람의 변화에 대한 믿음은 학생운동을 마치고 잠시나마 시민단체에서 일했던 이십 대 동안 내 가장 중요한 신념이었다. 모든 것은, 상대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을 주지 못하는 내 부족함 때문이었고, 여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나는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인간은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는 생각은 사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분명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적어도 연애 관계에 있어서는, 변화를 기다리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일터와 수많은 업무적 관계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변화와 혁신을 요구받고 있다. 고로 연애는 모든 이들에게 이 압력들로부터 벗어난 최후의 쉼터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쉼터 안에서 자주 어린애가 된다. 사랑을 하기보다 사랑받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상태가 되기 쉽다는 얘기다.


물론 H가 상대에게 더욱 공을 들이고 애를 써서 먼저 사랑을 주면, 뭔가 변화하는 상대를 볼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친다 싶을 정도로 싸우는 한 쌍이 행복을 느낄 만큼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수십 년 맞춰가며, 혹은 견뎌가며 사느니 당장 그만두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면 금방 변할 거라고? 오, 노노. 노력해서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는 건, 그저 홀로 설 용기가 없어서 견디고 있는 것뿐이다.


견디는 이유


고통 속에서 관계를 그저 견디는 커플을 많이 본다. 그들 중 일부는 내가 떠난 후의 상대가 불쌍해서 견디고, 일부는 상대의 행동 백 가지 중 한두 가지쯤 되는 희망의 근거를 부여잡고 버티며, 결혼한 사람들은 자식 때문에 버틴다. 혹자는 겁나서 버틴다고도 하며, 일부는 종교적 이유, 남 눈치 때문에도 견딘다.


이 중 가장 솔직한 이유는 겁나서다. 사실 모든 이유를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혼자가 되어 휘청거릴 텅 빈 자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들 모두를 아이로 만들어 어른의 '그럴듯한 말하기 능력'을 싹 없애버리면, 아마도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


"혼자되기 무서워!"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서려면 튼튼한 두 다리와 넘어져도 좋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리가 하나 없다. 그래서 어릴 때는 부모에게, 나이 들면 부모의 몫을 덜어 애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혼자가 된 잠깐의 시기를 견디기 힘들어하며 헤어지자마자 주변에 소개팅을 종용한다. 그러다 좀 자기를 마음에 들어해 주는 것 같은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첫눈에 반했다는 둥 운명이라는 둥 하며 급속히 빠져든다. 너무 외로웠고 강박에 가까울 만큼 그 고독한 시간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은 없다.


사실 문제는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고독과 소속으로부터의 분리를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던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린 처방은 이렇다.


홀로 서는 용기를 연습하자. 혼자서도 즐겁게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고, 능동적으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연습을 조금씩이라도 해나가자. 혼자서도 충분히 건강하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 안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오롯이 지탱하는 두 발을 회복하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용기를 머금은 뒤에 사랑을 하자. 그리고, 나나 상대가 질식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거리를 인정하면서 사람을 만나보자.


오늘 너를 사랑하지만, 내일이라도 헤어질 수 있어. 이 정도의 존재의 독립성을 가진 사람만이 상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사랑한다는 게 다른 게 아니다. 내 뜻대로 지배하려 들거나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나만큼이나 존엄한 존재인 그를 그 자체로 존중하며, 두 사람이 자신의 길을 따라 커가는 참된 사랑을 공간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 스캇 펙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분리됨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들다, 물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