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07
알프레도 히치콕 (1899 ~ 1980)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지 못했다. 독특한 스릴러물과 영화기법들을 선구자적으로 구사했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불만이었다. 늘 불만스러운 입 표정과 몸짓으로, 그는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등장했다. 영화 평론가 압박용!
“나는 삐걱거리는 문소리로 서스펜스를 자아낸 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운 거리에서 죽은 고양이와 폐물들이 나뒹구는 것보다, 나는 대낮에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서 일어나는 살인이 더 흥미롭습니다.”
히치콕은 영국출신의 영화감독 겸 제작자다. 심리 스릴러물에 일가견이 있었고, 혁신적인 영화기법과 스토리텔링을 선보였다. 생전에 흥행은 성공했지만, 작품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후 그는 재조명되어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최후의 만찬에 5명을 초대한다면, 그중 한 명이 히치콕이라고 했다. 작은 키와 이중 턱 등 그는 외모 콤플렉스를 가졌고, 그는 영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스릴러물을 많이 만들었지만, 어린 시절 무서움이 많고 소심했다고 한다. 어릴 적 아버지 심부름으로 경찰서에 쪽지를 전달하러 갔는데, 경찰관이 10분간 그를 가두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한다.
그는 사전에 콘티를 충실히 만들고, 콘티 대로 영화를 짧은 시간 내에 촬영하는 카리스마 있는 감독이었다. 배우들은 감독의 부품이라는 불평도 많았지만, 제작자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좋아했다.
생전에 6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무성영화, 유성영화, 흑백영화, 컬러영화 등의 모든 유형의 영화를 경험해 가장 교범적인 영화감독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1950~60년대 그의 영화가 개봉될 때에는, ‘히치콕이 감독한 OO영화’라는 간판이 걸렸다.
그는 아카데미상과는 거리가 멀어 제작상을 한 번만 받았고, 감독상은 받지 못했다. 1968년 공로상을 받았을 때 “Thank you.” 하고, 아카데미에서 가장 짧은 인사말 기록을 남겼다. 많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는 마케팅 차원에서 카메오로 출연했던 최초의 감독이다. 그의 작품에는 자주 뚱뚱한 그의 자태가 보인다. 히치코키언(히치콕스러운)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그는 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남겼고, 금발의 미녀를 늘 등용했다.
1980년 히치콕은 영국에서 기사 작위도 받았다. 대학생 시절에 KBS 토요명화에서 그의 작품들을 자주 만났다. 갈매기가 무섭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