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인 05
김일 (1929 ~ 2006)
박치기라는 단어가 이제는 많이 낯설다. 프로 레슬링은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사라졌다. 미국에는 아직 프로 레슬링이 유행이다. 그가 지금 현역 선수라면, 아마 미국 시장도 평정했을 것이다. 그만의 전매특허 외다리 모션 박치기로!
김일은 1970년대 한국 흑백 TV시절, 인기 스포츠였던 프로 레슬링을 이끌었던 박치기 왕이다. 그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프로 레슬링에서 총 3천회의 시합을 했고, 20번이나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1982년에 도입되었으니, 1970년대는 국민 오락 겸 스포츠 경기로 권투와 레슬링 두 종목이 전부였다.
우리 동네 큰 공터에 간혹 가설 레슬링 경기장이 만들어지고, 남녀선수들이 펼치는 레슬링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김일은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서 태어났다. 워낙 강한 체력과 신체조건을 갖고 태어나,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1956년 역도산 선수에게 레슬링을 배우기 위해, 28살 때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경찰에 잡혀 형무소에 있는 동안, 일본 역도산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역도산이 운 좋게, 그의 편지를 읽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그를 석방시켜 주고, 제자로 삼았다. 역도산 밑에서 레슬링 선수로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스승이 야쿠자에 죽음을 당하자 1965년 한국에 귀국했다.
한국도 프로 레슬링이 붐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김일이 합류해 판이 커졌다.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선수생활을 하다가,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1995년 일본 도쿄 돔에서 6만명의 관중 앞에서 은퇴식을 가졌고, 2000년 장충 체육관에서 국내 은퇴식도 가졌다.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자신의 고향에 전기가 들어오게 해달라고 했단다. 그의 고향 거금도는 제주도에 이어, 전기가 들어온 두 번째 섬이 되었다.
김일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박치기다. 한 발 외다리 모션의 박치기로, 경기를 끝냈다. 그의 박치기 동작에 맞추어 TV 아나운서도 “박치기!”라는 단어를 타이밍 맞춰 외쳤다.
한국 프로 레슬링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각본에 맞춘 쇼라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김일을 이을 만한 큰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후에 레슬링 후유증으로, 각종 질환에 시달리다가 2006년 영면했다.
전남 고흥에 김일 기념 체육관이 있다는 것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가 그곳에 남겨둔 선수로서의 흔적과 기록을, 직접 가서 한번 보고 싶다.
한 기자가 레슬링이 쇼 인지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면서 “인생이 다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치기왕 김일, MZ세대는 과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내가 어렸을 때 김일은 그야말로 슈퍼맨급 인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