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인 04
이순신 (1545 ~ 15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종식시킨 성웅이다.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장군의 기품을 잃지 않았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의 결연함은 광화문 광장에 우뚝 솟아 있다. 긴 칼을 옆에 차고서.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이순신 동상의 건립기 중 마지막 문단이다. 이순신은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과 함께 동상이 있을 만큼, 한국사를 통틀어 칭송받는 위대한 인물이다.
23전 23승 무패의 전무후무한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패한 일본도 그를 존경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두 번이나 구한 불세출의 영웅도, 두 번이나 백의종군을 했다.
그가 1587년 함경도 만호로 있을 때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반전의 일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왜장 가토 기요마시를 잡지 못했다(원균과 일본군의 모함)고 두 번째로 백의종군을 했다.
백의종군은 강제 노역형인 도형으로, 말단 군졸로 복무하는 충군을 의미했다. 그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버림받고, 두 번의 백의종군을 했다. 조선시대 정치인들이 정쟁에 밀려 기약 없이 유배를 떠났다. 장수가 백의종군했다는 것은, 유배와 다를 바 없는 징벌이었다.
유성룡과 같은 인물들의 도움으로 백의종군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인간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시련이 컸던 만큼 역설적으로 자기 담금질이 되었고, 자신의 진면목을 펼칠 수 있었던 또 다른 시험대가 되었을 것이다. 노량 해전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전사했다.
조선실록에서 한 사관은 이렇게 기술했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잘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