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rful Memories
일상 – Colorful Memories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안내하는 항해사는 자신이다. 자신을 믿고 운명의 주인이 되어, 장애물을 넘으면서 작은 승리를 맛보자.
인생은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발견은 이전에 누구나 본 것이지만,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신문 배달
매달 경영진에게 손익 윤곽을 보고하기 위해, 速報(속보) 작업을 했다. 나는 속보 작업을 진행시키기 위해, A3 사이즈의 전산용지 묶음을 사업부에 전달했다. 나는 이것을 ‘신문배달’이라고 불렀다. 철강프로젝트, 정보산업, 자원, 화학, 섬유 등 사업부 관리팀에 해당 분량을 절취해 신속히 배달했다.
엘리베이터로 각층을 다니는 것보다, 계단으로 이동하는 게 빨랐다. 가장 높은 우리 층에서 전산용지를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통해 배달했다. 신입사원이 주기적으로 자기 부서를 찾아오니, 선배들이 농담도 해주고 친해졌다.
나는 각층 계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알게 되었다. 누가 잡담하기 위해 자주 나오는지 등을 말이다. 한 번은 계단을 뛰어내려 오는 내 발소리에 놀라서인지, 남녀 직원이 후다닥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기도 했다.
개인 부서코드
내가 담당했던 철강프로젝트 사업부에서, 선배 책상 옆에 앉아 업무 질문도 했다. 선배들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가끔 나를 불러줬다. 사업부 관리팀 선배들은 자기들 부서 예산으로,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다.
당시 우리 팀은 부서코드라는 것을 만들어, 회사 전체의 비용현황을 관리했다. 어떤 부서에서, 어떤 비용을, 얼마나 사용하는 지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사업부 관리팀에서는 비용 성격을 구분하기 위해, 여러 개의 부서코드를 관리했다.
오죽했으면 나를 접대(?)하는 비용이 많다고, 내 접대용 부서코드를 따로 만들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해당부서 과장님께서는, 내 얼굴이 보일 때마다 그 말씀을 했다. 선배들이 자기들끼리 엄청 많이 먹고서는, 내 핑계를 들이밀었던 것 같다. 나는 쿨 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경비 정리
우리 팀은 회사 전체의 예산관리도 담당했다. 정부로 친다면 기획재정부였다. 공무원들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기획재정부에 굉장히 공을 들인다고 들었다. 회사에서도, 예산권을 쥐고 있는 곳은 힘이 있다. 가령 사업부장이 바이어 접대를 했는데, 회사의 예산 승인을 못 받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사업부 경비담당 여직원은 물론, 임원과 팀장들도 예산 때문에 본사 관리과장을 어려워했다. 경비 전표처리는 회계과에서 수행한다. 그러나 관리과장이 사전/사후 예산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절대 집행되지 못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우리 팀에게 가끔 초콜릿을 선물했다. 물론, 업무상 우리 팀을 잘 알던 사람들만 그랬다.
비목이라는 것을 통해 전사, 부서단위의 목적성 경비의 파악이 가능하다. 많은 경비 계정을 들여다보면, 영업을 위해 그리고 직원들 조직관리를 위해 집행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작은 거름이 되어, 회사는 수익을 창출한다. 회사 경비 계정들이, 인체의 실핏줄과 같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딜링 룸
물산은 종합상사여서, 사무실 풍경이 다른 회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웬만한 부서에는, 세계지도 하나씩은 걸려있었다. 모든 층에는 한국, 뉴욕, 도쿄, 프랑크푸르트, 런던의 현재 시간을 표시하는 벽시계가 옆으로 쭉 걸렸다.
진짜 멋있었던 곳은 금융팀의 딜링 룸이었다. 이곳은 외국환 은행들이 딜링 룸을 운영하는 콘셉트로, 사무실을 유니크하게 꾸몄다. 일반 사무실보다 더 좋은 인테리어, 멋진 디스플레이 기계들이 즐비했다. 내 후배도 이곳에 근무했는데, 딜링 룸 직원들은 왠지 전문가처럼 멋져 보였다.
당시 이런 말이 있었다. 관리팀과 경리팀은 오락으로 고스톱을 치는데, 금융팀 직원들은 포커를 한다고. 아무튼 딜링 룸은 당시 우리 빌딩에서, 독보적인 사무실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2000년대 물산이 분당 사옥으로 이전할 때, 한 개 층을 회의실 전용으로 만들었다. 회의실 이름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다가, 글로벌 도시 이름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뉴욕 룸, 파리 룸, 런던 룸 등으로 작명되었다. 회의실마다 이름에 걸맞은, 장식과 사진이 비치되었다. 종합상사는 이래저래 재미있는 곳이었다.
배구경기 응원
그룹 관계사들의 단체 체육경기가 간혹 있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회사 간 경쟁심과 승부의 박진감도 넘쳐났다. 우리 회사와 한 금융 관계사의 여자 배구경기가, 서울 외곽의 실내 체육관에서 열렸다. 나는 우리 부서 대표로, 이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참석했다. 부서 대표라고 하지만, 팀 막내였고 내가 살던 생활관과 체육관이 가까웠기 때문에 선발되었다.
우리 회사 배구팀이 2세트를 순식간에 내리 빼앗기고, 3세트도 고전했다. 응원단도 거의 포기하고 있는데, 우리 팀 과장님이 응원단 앞에 상기된 모습으로 나섰다. 일장 연설을 하시고는, 우리들의 정신 상태를 크게 나무라셨다. 이후 모두가 미친 듯이 응원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회사가 내리 3세트를 따냈고, 믿기지 않는 승리를 했다.
경기 후 삼삼오오 호프집에 맥주를 한잔했는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뛴 상대편 금융사 멤버들 중에는, 학교 때 실제 배구 선수들이 몇 명 있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 꼭 응원하고 싶은 팀 경기에서는 간절히 응원했다. 단체 종목은 응원에 힘입어, 경기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어질 수 있다. 특히, 아마추어 경기는 더 그랬던 것 같았다. 그날의 현장감은 정말 대단했다.
구두닦이
사무실에서 스포츠머리의 아저씨가, 양손에 신발을 여러 켤레 들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무 거치대를 이용하기도 했다. 사무실내 직원들의 구두를, 월 일정금액을 받고 닦아주는 분이었다.
계단을 이용해 사업부를 방문할 때, 나는 그 아저씨와 자주 마주쳤다. 사무실 계단 쪽에서, 신발을 쭉 펼쳐두고 작업을 하셨다. 워낙 손이 빨라 한 켤레를 닦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한 층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날에는 다른 층에서도 보였다. 몇 명이 삼성본관 건물의 몇 개 층을 나누어서, 신발을 닦는다고 들었다.
나도 그 아저씨에게 구두를 닦았다. 여분의 구두가 사무실에 없는 높은 분들 때문에, 구두닦이 아저씨를 찾느라 여직원과 신입사원이 뛰어다니는 촌극도 간혹 있었다. 나는 꼭 여분의 구두를 사무실에 두었고, 번갈아 가며 닦았다. 회사 막둥이, 생활의 지혜!
그 아저씨가 퇴근할 때, 지하 주차장에서 자가용을 타고 돌아가는 것을 선배가 봤다고 했다. 멋집니다, 삼성본관 구두닦이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내가 2000년 그룹에 파견되었을 때도, 여전히 몇 개 층을 그 아저씨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아저씨를 만났고, 인사도 서로 나눴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구두를 신으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