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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포국수 Jul 31. 2024

추사풍 - 먹거리

알파에서 오메가

먹거리 – 알파에서 오메가


당신의 재능을 똑같이 가진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역사를 통틀어서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당신과 평생 함께할 사람은 자신뿐이다. 자신의 본성과 평생 연애해야 한다.




덕수궁 김밥

삼성본관에서 3분 정도 걸으면, 덕수궁에 도착한다. 우리 부서는 화창한 날 점심시간에, 가끔 덕수궁에 갔다. 덕수궁 바로 옆에는, 맛있는 김밥을 파는 집이 있었다. 막내였던 나는 덕수궁에서 김밥을 먹을 수 있도록, 깔고 앉을 신문지도 한 묶음 들고 갔다.


덕수궁은 참 독특한 곳이다. 그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영락없이 조선시대, 대한제국의 풍경이다. 그런데 눈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높은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는 곳이다. 신문지를 깔고 김밥을 먹으며, 고즈넉한 풍경을 즐겼다.


매일 야근하던 신입사원의 눈에는, 선배들의 내공과 멋을 살짝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야근 걱정보다는, 오늘 야외에서 점심 먹었다고 자찬했다. 그렇게 해야, 오후 근무가 우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수궁 입구에는 조선시대 전통 무사 복장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병사들이 교대할 때는,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으며 신기한 듯 구경했다. 전통 무사 복장의 병사들은, 현역 또는 사회복무요원이라고 들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건너오는 지하도에 그들이 환복 하고, 잠시 쉬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남대문 시장의 지하도를 오가며, 그곳에서 쉬던 그들을 가끔 봤다. 수염을 달고 근엄하게 덕수궁을 지키던 그들도, 영락없는 대학생 분위기였다. 덕수궁 김밥 먹는 날은, 시내에서 소풍을 즐기는 날이었다.


야참

사무실 창밖이 어두워지면, 직원 몇 명이 인근 가게에 투입되었다. 우리 부서 야참 메뉴는 떡볶이, 김밥, 삶은 계란, 구운 오징어, 사이다, 과자 등이었다. 야참을 준비해 사무실에 오면, 회의 테이블에 모여서 이야기하며 먹기 시작했다. 과장님이 퇴근하면, 졸들은 2부 업무에 돌입했다.


구운 오징어에 왜 사이다인지 이해가 안 됐지만, 나도 점차 익숙해졌다. 야근을 하다가 트림하면, 구운 오징어 냄새가 풀풀 났다. 퇴근이 늦어지면 선배들과 맥주 한잔에 소면과 골뱅이, 소시지를 또 먹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을 잤다. 마치 기계를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것처럼 야참과 퇴근길 한잔은 나의 연료였고 윤활유였다. 별을 보고 출근하고, 별을 보며 퇴근했다. 당시에는 모두 그랬다.


비장한 저녁

본사 관리팀에게는, CEO 주관 경영회의가 매월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실적 집계와 최종 보고회까지, 전 부서원이 매달 2 주일 이상 매달렸다. 이외에도 업적평가 시즌이나, 그룹에서 긴급 오더가 떨어지면 야근으로 이어졌다. 신입사원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결혼하기 전이라,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 하는 데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좋지만, 어려운 과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실 편하지만은 않았다. 야근할 때 선배가 고기를 사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많이 먹어라. 먹지 않고 일하다 가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몸에 탈 난다.” 나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비장한 마음으로 고기를 먹었다.


지금 같으면, 그 선배들은 법(?)을 위반한 사람들이다. 당시 나는 선배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일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업무실력이 쌓일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영업부서 동기들이 거래선 만나러 간다고 할 때, 나는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폼生폼死(폼에 살고, 폼에 죽다)

당시 시내 대로변에는 신문, 복권, 담배를 팔던 부스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회사 대로변에 커피 부스가 출현했다. 당시에는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은 없었다. 난다랑 커피 아니면, 다방 커피, 자판기 커피뿐이었다.  커피 머신으로 원두커피를 만들어 주는 부스가, 시내 한복판에 등장했다.


그런데, 그 커피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라면정식보다 더 비쌌다. 나는 그룹 구내식당에서, 식판으로 점심을 먹었다. 사무실에 돌아오는 길에, 여직원들이 커피 부스에서 커피를 사서 광장에서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사무실에 올라가서, 내 자리에서 커피믹스를 한잔 마셨다. 여직원들이 점심 한 끼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꿈나라에 갔다.


밀어주자!

점심시간 삼성본관 뒤편에서 강남 모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한동안 스포츠 신문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던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예명)이 아직 기억나는데, ‘최미남’이었다.


그 사람이 나눠준 스포츠 신문 속에는, 자신의 명함과 자신을 홍보하는 소형 만화책까지 들어있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스포츠 신문의 만화와 기사는 당시 인기 있었다. 오랫동안 무료 신문 서비스를 제공받다 보니, 우리도 ‘한번 밀어주자’라는 여론(?)이 생겼다. 그래서, 팀원들이 그곳을 한 번 방문하기도 했다.


요즘은 신문 가판대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모바일로 웹툰을 볼 수 있다. 3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스포츠 신문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사람은 신문을 나눠줄 때, 자신의 업소 복장에 명찰까지 달고 있었다. 그는 밤무대의 프로페셔널이었다.


기습 집들이

대학 선배가, 인사팀에서 우리 부서로 전배 되어 왔다. 이 선배는 자칭타칭 순천의 천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하는 것을 보니, 일도 시원시원하게 잘했다. 형수가 약사라며, 선배는 경제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고 늘 자랑했다.


직원들끼리 저녁을 먹다가, 선배가 집에 전화만 하고 우리는 신혼집에 들이닥쳤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정(?)이라고 생각했다. 좁은 살림집에 알코올 냄새 풍기는데, 간단한 술상을 챙겨주던 형수한테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기습 집들이를 피하려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에 집이 있으면 되었다. 기습하려고 해도, 돌아가는 택시비용과 다음 날 출근시간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년 뒤 나는 신도시 쪽에 살았기 때문에, 기습 집들이는 면했다. 한편, 서울에서 신혼집을 가졌던 능력자들이 은근히 부러웠다.


통돼지 바비큐

한 해가 마무리되는 날, 사무실에서는 송년회가 조촐하게 열렸다. 오전 근무를 마무리하고, 음식과 음료가 준비된 곳에 층별로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 회사에는 색다른 메뉴가 있었다. 통돼지 바비큐.


선배의 말에 의하면, 자매부대에서 송년회에 맞추어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부대에서 며칠 동안 땅에 돼지를 파묻고, 굽고 익힌 것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자매부대에 물질적인 지원을 하겠지만, 정성스러운 보답품이라고 생각했다.


두 마리의 돼지 바비큐는 인사팀 직원들에 의해서, 각 층으로 신속히 배달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부드러운 식감의 돼지 바비큐, 그리고 캔 맥주의 환상적인 조합이 아직 생각난다. 통돼지 바비큐를 먹으면, 또 한 해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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