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as
독특한 Profit Center – Midas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운명의 지배를 받게 된다.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은 노예나 마찬가지다.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감정과 행동을 잘 다스려 인생의 주도권을 쥔다.
삼성본관 빌딩사업부
1976년에 준공된 삼성본관 빌딩은, 원래 삼성물산의 사옥이었다. 2009년 리모델링 당시에 석면이 이슈화되기도 했지만, 내가 근무할 때만 해도 최첨단 빌딩이었다. 엘리베이터 홀을 제외하면, 양쪽 메인 사무실 공간에는 기둥이 한 개도 없었다. 회사에서 큰 조직개편이 있어도, 사무실 레이아웃을 쉽게 변경할 수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건물 입지가, 재물이 모이는 곳이라고 들었다. 나는 그곳에 근무했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울시청 앞 27층의 흰색 건물이다. 삼성본관 빌딩도, 회사에서 엄연한 Profit Center였다. 모든 부서들은 ‘사내 임차료’라는 비목으로, 빌딩 임차료를 부담했다. 그것은 빌딩사업부의 매출로 계상되었다. 회사전체의 실적 집계를 할 때는, 공통에서 사내 임차료 매출과 비용을 제거해 중복을 피했다. 외부 회사에 대한 임대료는 당연히, 세금 계산서가 발행되고 매출로 계상되었다.
빌딩사업부는 회사 내 가장 높은 수준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시현한 Profit Center였다. 년간 100억 내외의, 사무실 임대이익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차년도 사내 임대료를 책정할 때, 서울 주요 비교대상 사무실의 임대료 현황을 관리회사에서 전달받았다. 1987년에 준공된 여의도 LG 트윈타워 보다, 평당 임대료가 살짝 높았다. 당시 삼성본관 빌딩은, 우리나라 최고의 평당 임대료를 자랑했다.
경영회의에서 빌딩사업부의 매출과 손익이 발표되면, 영업 사업부장들은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사업부 매출은 엄청 크지만, 손익은 빌딩사업부에 비해 현격히 작았기 때문이다. 빌딩사업부는 비교대상인 담당임원이 없기 때문에, 영업 사업부장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산이 IMF 때문에, 삼성본관 빌딩을 1998년 삼성전자에 매각했다(2009년 삼성생명이 전자에서 매입, 현재는 삼성생명의 소유). 이후 물산 상사부문은 인근 생명빌딩 임차, 분당 삼성플라자 사옥, 서초동 삼성타운 사옥, 잠실 임차 등 이사를 많이 다녔다.
올해 상사부문이 삼성본관 빌딩에 재 입성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물산 후배님들, 자부심을 가지세요. 그곳은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모였고, 임대료가 가장 높았던 빌딩이었답니다.
지하 매장
삼성본관의 사무실은, 대부분 물산과 그룹에서 사용했다. 저층부에는 카드, 증권 등 일부 금융 관계사들의 점포가 있었다. 치과, 국내외 금융기관 몇 개도 있었다. 당시 지하 1층은 신세계 백화점에서 매장을 운영했다. MD 구성 등은 물산의 영역이 아니었지만, 옷 매장과 식당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에 ‘장미라사’라는 남성정장 맞춤복 가게가 있었다. 지하 식당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나는 2000년대 이곳에서, 기회가 되어 와이셔츠를 두어 벌 맞춰 입었던 적이 있다. 가격도 높았고, 품질 수준도 높은 곳이었다. 이 가게는 지금도 본관빌딩 지하매장에서 운영되고 있다.
※ 참고 : 장미라사의 홈페이지 내용
장미라사는 1956년 삼성 (주)제일모직 양복 원단 테스트 부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삼성과 제일모직의 심벌 '장미'와 당시 이병철 회장님의 유럽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모티브로 구라파를 의미하는 '라' 그리고 실 '사'자를 조합해 '장미라사'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 오리진은 삼성!
지하 매장에서 세무 이슈가 발생했다. 삼성본관 빌딩과 삼성생명 빌딩(현재는 부영그룹 소유) 사이에 왕복 4차선의 도로가 있다. 그 도로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백화점의 매장들이 있었고 판매행위가 있었다. 사전 신고와 절차 없이 공용 도로의 지하에서, 판매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경리팀에서 담당했던 이슈인데, 벌금과 지하매장 레이아웃 변경 등 후속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참 독특했던 사례로 기억된다.
삼성본관의 신세계 지하매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덧붙인다. 삼성은 한솔, CJ, 신세계 등과 패밀리 그룹이다. 1991년 전주제지(한솔그룹), 신세계백화점(신세계그룹)이 계열 분리되었다.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에서 분리되어, 1990년대 초반에 계열 분리가 완료되었다. 1987년 선대 회장(故 이건희)의 취임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패밀리 그룹들이 모두 잘 성장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한 뿌리였다.
의류/섬유사업
철강프로젝트사업부에 이어, 나는 의류부문(에스에스패션)을 담당했다. 상사의 전통적인 수출입과는 달리, 내수영업을 하던 곳이라서 독특했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자가 제조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제조공장은 구로에 있었다.
구로공장은 신사복 봉제와 물류센터를 겸했다. 봉제 여직원들의 기숙사도 공장에 같이 있었다. 내가 구로공장을 방문했을 때, 사감이 기숙사도 소개해줬다. 봉제 여직원들은 일과가 끝나면, 인근 야간 고등학교에서 주경야독을 했다.
종합상사는 제품의 중개 기능이기 때문에, 제조기반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섬유사업부는, 국내외 공장을 관리하는 기능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과테말라에는 사업부가 투자한 제조공장도 있었다.
섬유사업부를 관리 담당했던 선배가, 국내 투자공장의 운영경험을 나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여직원들이 명절 때 고향에 갔다가 복귀할 때, 관리담당은 신경이 늘 써였다고 말했다. 고향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공장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담당은 주기적으로 시골 마을에 찾아가서, 부모님의 마음도 관리했다고 한다. 참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다.
섬유영업 선배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Made in Korea 시절 미국 할인점에 납품되던 옷의 생산지를 추적하면, 강원도 산골의 아주머니들이 봉제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봉제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물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당시에 시골 마을까지 총동원되었던 것이다.
섬유사업부는 수출지역 등을 감안해, 인도네시아나 과테말라에 봉제공장을 투자해 운영했다. 이런 곳은 인건비 측면에서 유리했지만, 문제는 옷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시사철 더운 곳이어서 겨울 코트를 제작하려면, 코트의 개념부터 현지인들에게 설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섬유 수출한국을 일구었던 상사 맨들은 판매처 확보뿐만 아니라, 원가 경쟁력 있는 생산거점 확보도 필수였다. 선배님들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