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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포국수 Jul 03. 2024

추사풍 - 신입사원

Blue Dream

신입 사원 – Blue Dream


신입사원, 얼마나 가슴 설레는 단어인가!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서울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도심의 높은 빌딩 속 많은 인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 나를 긴장시켰다.


첫 출근부터, 회사의 친절과 배려를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X세대는 지금의 MZ세대처럼, 자신들의 색깔을 사무실에서 드러낼 수 없었다. 회사에서 요구되고, 해야 하는 일을 충실히 하는 회사원이 되어야 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학생이 아니라 회사원이다!”라고 나 역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여담으로 내 대학시절 기억을 한 가지 말하겠다. 대학 입학식 날, 파란색 바탕의 간판에 입학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졸업식 때는 빨간색 바탕이었다. 청운의 꿈을 꾸고 입학했는데, 피멍이 들어 졸업한다는 의미? 아무튼,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색깔 조합으로 기억된다. 신입사원 하면, 대학 신입생처럼 Blue 색깔이 떠오른다.


MZ세대 여러분,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 깨어난 사람으로 살기 바랍니다. X세대여, 영혼의 불꽃을 다시 한번 피우지 않겠는가?




남대문 양복

1990년 4월 입사 후 연수과정을 마치고, 5월부터 서울시청 앞 삼성본관에 출근했다. 아버지께서 내 하숙집(회사 기숙사가 7월 말 준공이어서, 몇 개월 하숙을 했다)에 오셔서, 첫 출근 준비를 도와주셨다.


첫 출근을 앞둔 휴일,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에 가셨다. 양복을 사려고 갔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양복을 산 뒤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양복을 입은 적이 거의 없으셔서, 양복을 고르는 안목이 없었다. 그냥 남대문 제품이 싸고, 질이 좋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10만원을 주고 샀는데, 당시 가격으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물정 모르는 촌사람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이다.


하숙집에서 살펴보니, 양복의 컬러가 이상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붉은 벽돌 색이었다. 첫 출근을 하고 선배들을 보니, 대부분 차분한 컬러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선배들이 나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대문보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양복을 뜸하게 입다가, 결국 입지 않았다.


나의 첫 출근은 피에로 같은 양복으로 시작되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부산 말투의 촌놈이라는 생각을, 애초에 하고 있었다.


한자와 숫자 쓰기

나는 부서에 배치받고 첫 1개월 동안 숫자 쓰기, 2개월 동안은 한자 쓰기를 했다. 매일 한 페이지 씩, 펜글씨로 써서 과장님에게 검사를 받았다. 검사받는 동안, 나는 과장님 책상 옆에서 선채로 사인을 기다렸다. 우리 부서와 옆에 있는 직원들이 수군수군했다. 자기들은 안 했는데, 이상하다고…


나도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과장님이 지시한 업무(?)였기 때문에 매일 했다. 처음에는 정성 들여서 펜글씨를 하다가, 시간이 없을 때는 막 쓰기도 했다. 한석봉 어머니처럼, 한결같이 떡을 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리팀 직원은 숫자도 잘 써야 하고, 글씨체도 좋아야 한다.”라고 과장님은 말씀해 주시며 사인해 주셨다. 중요한 것은 마음 수양이라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도 말씀해 주셨다. 그 과장님은, 2021년 하늘나라에 일찍 가셨다. 지금도 나의 숫자와 글씨체가 좋지 않은데, 그때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것 같다.


사무실 흡연

내가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실내 흡연을 했다. 첫 출근 날, 같은 부서 여직원이 나에게 담배를 피우는지 물어보았다. 담배를 피운다고 했더니, 다음날 아침에 재떨이가 내 책상 위에 놓였다.


신입사원이라 눈치가 보여 조심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흡연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안 되는 사무실 흡연이다. 요즘은 건물 내 흡연이 안될 뿐만 아니라, 건물 밖에서도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벌금을 내야 한다. 나도 금연한 지 오래되어 담배 연기를 마주하면, 코를 막고 피한다. 당시 여직원들과 비흡연자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흡연이 길거리로 밀려나가기 전에, 기계수입팀에서 담배연기를 제거해 주는 독일산 테이블식 기계를 수입했다. 학교 동기가 자신이 수입한다고 자랑해서 잘 안다. 삼성본관 건물 몇 군데에 시범적으로 설치한 후, 본격적으로 사업화했다. 한참 뒤 공항 터미널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담배연기 흡입기계 같은 것이다. 담배 연기가 제거되는 모습이, 고깃집에서 불 판 연기가 제거되는 것과 유사했다. 이런 기계까지 설치하면서, 애연가들을 보호해 주었던 1990년대 우리 회사 사무실이었다.


2000년대 이야기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고 나서 20여 년 만에 금연했다. 일도 힘든데, 담배와 술을 같이 해서는 체력적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웠다. 당시 그룹에서 대대적인 금연운동을 실시했는데, 나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도전했다. 다만 금연운동 개시일이 4월 1일이었는데, 그날이 만우절이라 거짓말인가 살짝 의심하기도 했다. 금연하기 하루 전날, 양복 주머니 속 담뱃갑을 가위로 자르고 퇴근했다. 피크 때는 하루 2갑 이상을 피웠는데, 회사지원으로 패치 치료제를 3개월 붙이면서 금연에 성공했다. 아내가 칭찬한 첫 번째 작품이, 나의 금연이다.


따르릉 시계

대학교 한 해 후배가, 옆 부서인 회계과에 들어왔다. 당시 회계 과장님은 우리 학교 선배였는데, 성격이 칼과 같았다. 경비 정리하러 온 여사원들이 서류를 대충 가져왔다가, 혼이 나서 돌아가곤 했다. 마음 약한 여직원들은 탕비실에서 눈물까지 훔쳤다. 그런 분이다 보니, 부서 직원들의 사소한 실수나 회사 룰에 어긋나는 행동은 참지 못했다.


후배가 출근시간에 임박해 들어오면, 조회가 끝나고 어김없이 과장님 석에 불려 가 혼이 났다. 본인은 따르릉 시계 2개를 시차를 두고 설정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목청을 높여 말했다. 후배가 그 조치대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옆 부서의 내가 오히려 벤치마킹했다. 나는 좋은 방법이라고 공감했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결혼 후에도 나는 따르릉 시계 2개를 머리맡에 두고, 아침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임원이 되고, 직원들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퀴즈 게임을 했다. 사전에 부장급 이상이 작은 선물을 준비해, 직원들이 퀴즈를 맞히면 주자고 내가 제안했다. 나는 빨간색 따르릉 시계를 선물로 제출했다. 이 선물을 받았던 직원이 개봉했을 때,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내가 옛날 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었더니, 그제야 흥미롭게 생각했다. 아침마다, 얄밉게 울렸던 따르릉 시계.


능력자

업무를 하면서, 유관부서 사람들을 차츰 알게 되었다. 금융, 인사, 사업부 관리, 영업부서, 전산실 등 다양했다. 당시 회사의 여직원들은 99%(의류 디자이너 제외) 고졸 출신이었다. 남자도 고졸 출신들이 제법 있었다.


선배의 말에 의하면, 여직원들은 서울여상 등 수도권 Top 실업계에서 전교 등수 안에 들어야만 입사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회계과 등 지원부서 여직원들은 정말 똑똑했다. 고졸 남자들도 해당 부서에서 자기 몫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교 출신의 신입사원이 들어와서, 그들의 그늘을 수년이 지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업부 관리팀 선배 중 한 분이 생각난다. 이 분은 사업부의 경영실적, 히스토리, 사업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물어볼 만한 것을 미리 가르쳐줘서, 나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짬밥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배도 나오고 완전 아저씨였는데, 성격은 굉장히 유쾌했다. 당시 회사 내 직원들은 출신을 막론하고, 내 눈에는 모두 능력자였다. 회사 사업만 좀 잘되었으면 정말 멋지고 좋았을 텐데, 그 대목이 늘 아쉬웠다.


그룹에서 당시 물산을 바라보는 시각도 명확했다.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사실도, 잘 이해했다. 다만 인재를 많이 양성해, 관계사에 널리 보내야 한다는 미션을 강조했다. 물산은 1970년대부터 세계 곳곳에 해외 주재원을 보냈고, 선진국들의 상관습을 몸으로 체득했다. 당연히, 그룹의 국제화 창구가 되어야만 했다. 훗날 그룹이 필요할 때, 제 몫을 하셨던 선배들도 많이 계셨다.


말 그대로 인재의 삼성, 인재의 삼성물산이었다.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당시의 맨파워로, 지금 모두 같이 회사생활을 하면 어떨까? 멋진 선배, 동료들 덕분에 많이 배웠고 나 자신의 경쟁력도 갖출 수 있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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