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포국수 Sep 18. 2024

추사풍 - T/F 전성시대

과장 시절 ②

 T/F 전성시대 - 과장 시절 


농구에서 피벗(Pivot)이란 한 발은 제자리에 붙이고, 다른 발로만 몸의 방향을 바꾸며 패스할 곳을 찾는 동작이다.


경력에서의 피벗도 마찬가지다. 현재 자신이 위치한 안정된 기반에 한 발을 붙이고, 미래로 나아갈 곳을 한 발에 의지해 탐색하는 것이다. 피벗은 변화와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Dart 녹음기

1996년 1월 물산이 삼성건설과 합병했다. 이후 한 지붕 두 가족 형태로, 두 개의 사업 부문은 책임경영 체제를 유지했다. IMF 이후 물산은 그룹 관계사 가운데서 건설사업들을 통합해, 법적실체는 각각 그대로 둔 채 운영만 소그룹 형태로 했다. 엔지니어링, 중공업 건설 등이 물산 건설, 상사부문과 같이 운영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이슈 가운데, 해외 건설사업에서 어떻게 사업적인 시너지를 낼 것인 가였다. 각사가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당시 CEO, CFO들이 조찬회 형태로 회의체가 운영되었다. 실무자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다트 녹음기의 내용을 들으며 회의록을 작성했다. 나는 당시 이 일을 수행했다. 두 시간가량의 녹취를 듣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용어와 맥락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록은 논의된 내용 전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사항 중심으로 정리했다.


몇 번 하다 보니 2시간 녹취를 듣는 동안, 회의록을 완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녹취를 들으며 회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프레임을 만들면서 간결하게 정리했다. 얼핏 보면 단순한 작업인 것 같지만, 센스 있게 마무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일이 주어질 때,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일에 대한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개선하기 위해 고민했을 뿐이다.


참고로, Dart 녹음기에 대해 부언 설명을 하겠다. 1993년 삼성 신경영이 본격 전개되었다. 이때를 전후로 Dart 녹음기로 주요 회의를 녹음해, 주요 결정사항을 공유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삼성 기록문화의 한 형식이었다. 당시 일반 녹음기보다 음질도 좋았고, 분량도 카세트테이프 보다 훨씬 길었다. 회사의 주요 부서에서는, 이 녹음기를 비치해 놓고 활용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Dart 녹음기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카드 돌려 막기

아들이 1997년 동네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들의 귀가 빠진 날은, 물산 창립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이 놈은 아빠 휴일에 태어났으니, 내가 평생 생일을 챙겨줄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당시 창립 기념일은 유급 휴일이었다. 샐러리맨이 평일에 쉴 수 있는 날이 없는데, 그날은 공식 휴일이었다.


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나는 관계사로 한번 옮겼다. 그리고 그룹 전체적으로, 창립기념일에 하루 쉬는 제도를 아예 없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이래저래, 아들과 생일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요인들이 많이 생겼다.


아들의 첫여름이 다가왔다. 흰 분을 몸 여기저기에 발라도, 땀띠 때문에 고생했다. 아내와 상의해서, 스탠드형 에어컨을 사기로 했다. 당시에는 디지털 플라자 같은 가전제품 전문매장이 없었다. 서소문 그룹 사내식당의 한 층에 있던, 작은 전자제품 코너에서 삼성전자 제품을 구입했다. 그런데, 당시 에어컨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카드를 과감히 긁었다. 3개월 할부까지 했는데, 이 할부금을 막느라 카드 돌려 막기를 해야 했다. 당시 내 월급으로 생활비와 에어컨 할부금에는 모자랐던 것이다. 나는 에어컨을 생각하면, 몇 개월 카드를 돌려 막으면서 고생했던 그때 기억이 난다. 카드 돌려 막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된다.


T/F 또 T/F

나는 과장시절 마지막 약 2년 반 정도, 부서의 사무실에서 차분히 앉아 근무할 수 없었다. IMF 구조조정 T/F가, 바로 업무 유랑생활의 시작이었다. 약 6개월 동안 별도 공간에서 작업 후, 나는 겨우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런데 사무실에 복귀해서도, 지원부서의 다운사이징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만 했다.


얼마 후 손익기준, 평가제도 등 경영관리 제도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IMF 이후 경영기조가 많이 변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후속작업으로 T/F가 진행되었다. 나 혼자 별도의 공간에서 진행했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변경된 제도에 대해, 사업부 관리팀과 지원부서에 전달 교육을 마쳤다.


또 T/F가 가동되었다. 물산 에스에스패션과 제일모직 패션부문과의 통합 작업이었다. 양사 실무진의 공동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제일모직 건물에 상주했다. 물산 경리팀의 후배직원 한 명을 지원받았다. 이 작업은 적진(?)에서 진행되었지만, 업무적으로는 내가 압도했다. 의류사업의 통합 이슈는 중복투자 등의 문제점 때문에,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서 계속 있어왔다. 이것에 대한 결론을 내는 작업이었다.


본격적인 통합 검토에 앞서, 양사 실무진 첫 미팅 때의 일을 소개한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마커펜을 들고, 약 30개 정도의 보고서 목차를 순식간에 써내려 갔다. 내가 생각했던 발제 보고서의 순서였다. 정말, 그 순서대로 한 페이지씩 보고서를 만들었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내용들은 별첨으로 돌렸고, 본문의 간결한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했다.


이후 회사에서 사내 경영혁신이 화두가 되었다. 기존 관리팀 직원으로는 한계가 있어, 영업 등에서 두어 명을 내가 직접 뽑아서 경영혁신 분야를 터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 별도의 T/F가 다시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밀레니엄 T/F였다.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회사의 비전, 사업운영 체계, 새로운 경영의 틀을 제시하는 게 골자였다. 난데없이 회사 전체 전략 컨설팅을 맡게 된 것이다.


나름대로 공부하면서, 골방에 갇혀서 4~5개월 정도 작업을 했다. 홍보팀에서는 내가 하는 작업이 궁금했는지, 회사 승인을 받고 작업실에서 나를 인터뷰했던 적도 있다. 1999년 12월 최종 아웃풋이 보고 완료되었다. 좀 쉬고 싶었다. 2년 반 동안 과제 중심의 일을 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심신이 정말 지쳤다.


그룹 입성

입사 후 10년 동안 미친 듯이 일을 했다. 덕분에,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생겼다. 일을 맡게 되면 보다 잘 수행하기 위해, 늘 고민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에 대한 자신감도 점차 생겼다.


밀레니엄 T/F를 끝내고, 휴가를 내고 가족과 보광 휘닉스 파크에 눈썰매를 타러 갔다. 모처럼의 휴가를 마치고, 2000년 새해 첫 출근을 했다. 팀장님이 나에게 삼성본관(IMF 때 물산은 본관빌딩을 삼성전자에 매각)에 있는, 그룹 구조조정본부에 가보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씀을 안 해 주셔서, 나는 그냥 수첩만 챙겨서 그룹 재무팀을 방문했다.


그곳 여직원이 나를 회의탁자에 안내했다. 그룹 사무실은 관계사보다 사무공간을 넓게 사용했다. 다른 한 분도 나와 같은 탁자에서 대기했다. 순간적으로 ‘아, 면접을 보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뽑는다는 건가?’하고 생각을 하는데, 저쪽 회의실에 불려 들어갔다.


그룹 재무팀 총괄파트 임원이셨다. 자료를 전달하기 위해, 이전에도 몇 번 뵈었던 학교 선배님이었다. 몇 가지 물어보시더니, 모레부터 이쪽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말씀하셨다. 삼성물산 입사 후 10년 만에, 나는 그룹 재무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추억의 삼성본관에 복귀하게 되었고, 첫 번째(임원이 되고 나서 2번째 근무도 함) 그룹에서 7년간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차장/부장에 이어 상무 타이틀을 달고서, 나는 물산 금융팀장으로 7년 뒤에 복귀했다.


나는 태평로 삼성본관 사무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분들의 가르침 덕분에,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다. 나의 1990년대는 한마디로 멋있었다!




이전 12화 추사풍 - 몇 가지 Task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