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 시절 ①
몇 가지 Tasks - 과장 시절 ①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원하는 정보는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를 선별하는 능력이다.
세상은 박학다식한 사람보다, 꿰뚫어 보는 사람을 요구한다. 머릿속의 정보만 많을 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면 그 정보는 쓸모없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경비 330 운동
1992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이 처음 세계 1위로 올라섰다. 1993년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대 회장님(故 이건희)은 미국 'Best Buy'의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삼성 TV제품을 발견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삼성 신경영이 시작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되어, 임직원 1,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가 진행되었다.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만에 빠져 있다." 삼성은 내부의 자만 경계, 미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1996년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시작했다. 비상경영에 들어간 지 1년 후인 1997년, 우리나라에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IMF 이후 삼성전자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1990년대 삼성그룹의 큰 흐름이라고 보면 맞다. 이 흐름 속에서 삼성 신경영, 경비 330 운동, IMF 위기 돌파, 디지털 시장의 선점 등이 계속 있었다. 정말 숨 가쁜 일들이, 마치 각본에 의해 연출되는 것처럼 연이어 일어났다.
흔히 전략은 후발주자의 몫이고, 혁신은 선발주자의 몫이라고 이야기한다. 삼성은 1990년대 변화와 혁신에 대한 예행연습을 많이 했다. 덕분에 삼성전자는 2000년대 이후, 글로벌 Top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토양을 이 시기에 잘 다졌다.
그룹에서 경비 330 운동이 시작될 때, 몇 날 밤을 새우며 작업했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경비절감 운동의 골자는, IMF 구조조정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되었다. 최근 전자의 반도체가 파운드리와 HBM 이슈로 시끄럽다. 경비 330 운동은, 당시 반도체 적자 전환이 사실상 트리거였다. 지금 삼성전자는, 혁신의 트리거를 다시 당겨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 준비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성과를 기대한다.
숙녀복
물산 에스에스패션에 숙녀복팀이 있었다. 2개 정도의 브랜드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적자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숙녀복은 남성복에 비해 유행에 민감한데, 여성복 전문기업들에 비해 물산 의류부문은 대응이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사복, 간이복, 캐주얼, 스포츠 등 외형이 큰 브랜드들이 우선순위였기 때문이다.
부서 팀장님으로부터 숙녀복팀을 한번 다녀와서, 보고서를 올리라는 업무지시를 받았다. 당시 나는 의류부문 담당이었던 만큼, 사전준비를 마치고 숙녀복팀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숙녀복팀은 의류부문의 사무실이 아니라, 그룹 패션연구소와 같이 역삼동에 따로 위치해 있었다.
숙녀복 팀장, 수석 디자이너 등 사전에 미팅이 어렌지 되었던 분들과 면담을 순차적으로 했다. 조직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었고, 특히 본사의 간부가 찾아온다는 것에 긴장도 하고 있었다. 이후 숙녀복사업은, 제일모직에 사업 이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의류사업을 담당하면서, 나는 브랜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의류사업에서는 브랜드가, 사실상 최소단위 Profit Center다. 브랜드별 MD, 디자이너가 실제 사업을 이끌어 간다.
의류 브랜드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숙명적으로 진부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광고 등 회사로부터 투자와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 부진한 실적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 내에서 브랜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Scrap & Build 과정을 거치게 되며, 회사 전체적으로 브랜드의 포트폴리오도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시 숙녀복은, Scrap 단계에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제일모직의 숙녀복 사업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사업 이관이 선택되었다.
재무인력 양성
그룹 재무팀에서는 재무인력 현황 자료를, 일 년에 한 번씩 업데이트를 관계사에 요청했다. 양식은 매년 비슷했다. 개인별 간단한 프로필을, 엑셀 형태로 집계하는 형태였다. 당시 대대적인 그룹 인사카드의 전산화가 진행되었지만, 일목요연하게 자료 정리가 잘 안 되었다. 내용의 정확성을 위해서 더블 체크도 필요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수작업으로 업데이트를 F/UP 했다.
그룹 재무인력(관리, 경리, 금융 등)의 Pool을 관리하고, 양성한다는 취지였다. 그리고 그룹 재무팀에서, 향후 인력 영입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 나 역시 그룹의 엑셀 양식을 사업부 관리팀에 보내며, 언제까지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혼 없이 100여 명 되는 리스트를 그룹 재무팀에 줘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제에 대한 개선방법을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보고서의 양식을 디자인했다.
단순한 취합이 아니라, 양식의 정보를 토대로 나만의 메시지(보고서)를 만들고 싶었다. 본사와 사업부별 재무인력의 수준, 문제점, 인력양성 방안까지 비교 및 제안을 하고 싶었다. 비교와 평가를 위한 기준을 설정하고, 접근방법도 만들었다. 나는 사업부 자료들이 오기 전까지, 보고서의 분석 틀을 다듬고 다듬었다.
사업부에서 엑셀자료를 받고, 내가 디자인한 양식에 하나씩 대입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보고서의 윤곽이 드러났다. 완성하고 나니, 엑셀의 집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사업부에서 받은 엑셀 자료는, 그냥 별첨에 불과했다. 팀장이 CFO에게 내 보고서를 보고하는 과정에, CFO 방에 내가 불려 들어갔다. 당시 그분은 관계사에서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로 인해 물산 전체 재무인력 양성방안을 주제로, 경영지원실장들의 반나절 워크숍이 실시되었다. 메인 발제는, 내가 만들었던 자료가 활용되었다. 각 경영지원실장들의 발표, 토론 등이 진행되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콘셉트의 워크숍이, 나 때문에 진행되었다.
받은 것을 그대로 집계해 피드백하면, 그만인 일들이 회사에는 많다. 그러나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고 큰 관점에서 보면, 획기적인 아웃풋을 낼 수 있는 일들 역시 있다. 회사 일이란 것이 그렇다. 여러분도 멋진 경험을 자주 해보기 바란다. 그 보고서를 통해, 나만의 분석과 통찰력을 제대로 경험했다. 보고서는, 나의 분신! 내가 즐겨 사용했던 캐치프레이즈다.
항공권 클래스
IMF 구조조정의 핵심은 사업/인력/자산/비용의 다운사이징이었다. 일단 회사의 모든 것을 감축해,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IMF 때 해외 대학교에 MBA 공부하러 갔던 선배들도, 모두 국내로 소환되었다. 마치 이스라엘에 전쟁이 발발해, 전 세계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모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항공권 클래스 조정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겠다. CEO는 퍼스트 클래스, 임원은 비즈니스, 간부/사원은 이코노미석 이용이 일반적이다. 6시간 이상 비행일 경우에는, 간부들도 비즈니스를 탈 수 있는 회사들도 있었다.
IMF 때는 항공권 클래스가 한 단계씩 내려갔다. 특히 우리 회사 임원들은 해외출장이 잦다 보니, 항공권 클래스 조정에 예민했다. 하지만, 그룹의 전반적인 룰 세팅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후 각사마다 경영상황이 어려워지면, 어김없이 항공권 클래스 조정은 개별적으로 실시되었다. 회사의 경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단골 메뉴였다.
나 역시 임원이 되고 나서 비즈니스석을 이용해 보니, 아래로 내려가라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회사가 죽는 마당에, 개인의 체면과 불편함이 무슨 대수인가? 당시에는 모두가, 십시일반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좀 더 타이트하게 운영했으면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