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전문가 시절 ②
도쿄 - 지역전문가 시절 ②
세상에는 바쁜 문화가 만연해 있고, 거기에 휘말리기 쉽다. 바쁘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복잡성에 휘말려서 중요한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바쁨은, 생각 없는 서두름과 같다.
집/어학원
3개월간의 일본어 집합교육을 모두 마치고, 연수생들은 동경에서 각자 집을 구해 나머지 9개월간의 활동에 들어갔다. 나는 신주쿠 역에서 게이오 선으로 4~5번째 떨어진, 세타가야역 근처에서 1인용 맨션을 구했다.
내가 세타가야의 맨션에 산다고 하면, 일본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시내에서 가깝고, 부유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일본본사 직원의 말에 따르면, 직장인은 편도 전철로 1시간 30분 출근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 안쪽에 집을 구해 살기에는,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야근을 하거나 술을 늦게까지 마셔 전철이 끊기면,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캡슐호텔을 이용한다고 했다. 먼 거리 때문에, 귀갓길 택시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어 학원은, 요요기 공원의 카와이주크에 등록했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일본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하는 전문 어학원이었다. 중국인 학생들이 많았고, 한국 유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쯔네이시 시절보다 고급 일본어를 공부했다. 여기서 공부하면서, 일본 TV 시청도 한결 수월해졌다. 나는 아사히 신문 사설을 매일 스크랩하면서, 읽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쿄에서의 생활은 심플했다. 아침에 신주쿠 역에서 전철을 갈아탈 때, 커피와 핫도그(참고로, “호또도그 또 코히”라고 주문)로 아침을 해결했다. 카와이주크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집 인근 식당이나 편의점 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저녁에는 TV 시청, 복습과 예습, 아내와 국제통화 등 반복되는 일과들이었다.
지역 연구
연수기간 중 일본 지역연구라는 과제가 있었다. 회사 연수 담당자에게 계획표를 제출해 예산을 배정받고, 지역연구 실행 후 결과보고를 했다. 나는 일본어 공부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 지역연구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규슈 지역, 도호쿠 및 홋카이도 지역, 오사카와 긴키 지역, 도쿄도 근방 등 크게 4개 권역의 지역연구 활동을 각각 일주일 정도씩 했다.
나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신주쿠에서 소니 캠을 구매했다. 지역 연구할 때 그것으로 동영상을 찍고, 방문지에서 내레이션 하며 전부 비디오로 기록을 남겼다. 요즘 TV의 여행 셀프 캠, 여행 유튜버 같은 콘셉트다. 촬영하기 전에 해당 안내판을 빨리 읽고, 핸드 캠을 보면서 한국말로 해석을 했다. 물론 주위 경치와 경관도 찍었다.
지역연구를 할 때는 신칸센, 전철, 버스, 도보 등 100% 내 계획에 따라 이동했고, 보고, 느끼고, 기록했다. 내 인생에 그런 경험은, 아마 앞으로도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때의 소중한 기록들은 좀 더 나이가 들면, 제대로 한번 정리를 하고 싶다. 일본에는 내가 다녔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마치 달나라에, 아폴로 우주인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통역
한국에서 출장자들이 왔을 때, 일본인들과 미팅 자리에 차출되어 통역했던 경험도 있다. 유창한 일본어는 아니었지만, 7개월 차 연수생의 통역을 나 스스로도 대견하게 생각했다.
한 번은 국제화연수팀(그룹 연수원 소속)에서 그룹 SBC방송과 함께, 글로벌 에티켓 일본편의 제작을 위해 일본에 왔다. 이때 내가 적임자로 그룹에서 지정되어, 이 팀과 함께 에티켓 프로그램을 찍었다. 장소 이동과 섭외를 하는 일본 현지 코디네이터와 함께, 나는 출장팀이 머무는 4일 동안 통역과 안내를 담당했다. 참고로 당시 코디네이터는 재일교포 2세였는데, 스모선수 출신이었다. 크기가 작지 않은 봉고차였는데, 선탑했던 내가 조금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작성된 원고도 없이, 글로벌 에티켓 프로그램의 주인공 역할까지 소화해야 했다. 그 팀이 돌아간 뒤 탈진할 정도로 힘들었고, 결국 며칠 동안 몸 져 누웠다. 하지만 일박에 인당 5만엔(50만원)의 고급온천을 방문했던 것은, 연수생이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았다. 이때 찍었던 내용은 그룹 연수원 교육과정과 관계사 아침방송에도 방영되어, 나를 아는 분들의 축하 인사를 많이 들었다.
일본 드라마
쯔네이시에서 도쿄에 올라왔을 때, 나는 전자상가에서 TV와 비디오 녹화기 일체형과 전화기를 구매했다. 혼자 생활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필요했던 물품이었다. 선배 연수생들에게서 들었던, 일본어 공부방법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나는 매일 저녁 또는 휴일 TV에서, 정해둔 몇 개의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비디오로 녹화했다. 내가 외출 중일 때는 예약녹화를 꼭 했다. 당시 녹화했던 테이프들이, 우리 집 어딘 가에 아직 있을 것이다. 일본 드라마 시청은, 일본어 대화체를 익히기에는 최고의 공부방법이다.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학습 몰입감도 있고,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에 녹화했던 이유는,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전화기는 루스방이라고 해서, 자동응답 기능이 탑재된 전화기였다. 처음 집에서 전화기를 설치할 때, 매뉴얼에 따라 내 보이스를 일본말로 녹음했다. “내가 지금은 부재중이니, 삐 소리 후에 음성 메시지를 남겨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매일 집에 돌아와서는 루스방 버튼을 눌러, 혹시 전화 온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루스방 전화에 얽힌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한다. 앞에서 그룹 국제화연수팀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그 팀 직원이 한국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루스방 전화 녹음을 듣자, 일본 사람 집에 잘못 전화한 줄 착각해고서 그냥 끊었다고 했다. 결국 이 팀의 출장 지원 건은, 도쿄지사를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일본말로 루스방 멘트를 남겼는데, 한국말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일상생활
연수생들은 일본에 파견될 때, 개인 노트북을 지급받았다. 나는 노트북을 이용해 일기를 썼으며, 지역연구 활동보고서 그리고 경영서적 한 권을 일본에서 번역했다. 그때 익혔던 매일 글쓰기 훈련은, 내 직장 생활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쿄 생활 중에 주재원 선배들이 가끔 고기와 술을 사 주셨고, 그분들의 집에도 방문했다. 나와 한국에서 친했던 출장자들이 올 경우, 가라오케도 같이 갔다. 일본의 가라오케는 썰렁하기 그지없다. 좁은 공간에 촘촘히 앉아, 구형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노래자막을 따라서 불렀다. 그래도 이런 자리들은, 연수생 일당으로는 갈 수 없던 곳이었다. 주재원 선배들이나 출장자가 아니었다면, 경험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일본 문화를 가끔 즐겼다.
나는 벵쿄카이(勉强會)를 했다. 일본인들과 삼성 지역전문가들의 정기적인 공부 모임이었다. 선배 기수 연수생들이, 이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이 한국에 돌아갈 때, 다음 기수중 일부가 동일한 일본인들과 계속 공부하고 친교를 했다. 벵쿄카이의 멤버들이 같이 갔던 후지산 록 페스티벌 1박 2일 여행, 회원이었던 일본인 커플의 결혼식에 초대되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같이 공부했던 일본인들이, 가끔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