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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포국수 Aug 21. 2024

추사풍 - 쯔네이시 연수소

지역전문가 시절 ①

쯔네이시 연수소 - 지역전문가 시절 


‘더 투나잇 쇼’ 진행자 자니 카슨은, 콘래드 힐튼에게 호텔제국을 건설하면서 배운 것 중에서 미국인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힐튼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샤워 커튼을 욕조 안으로 넣는 걸 잊지 마세요.”




파견전 교육

나는 1994년 12월 일본에 파견되어 1년간 어학연수, 지역문화 습득 등을 골자로 하는 삼성 국제화 프로그램 과정(지역 전문가)을 이수했다. 이 제도는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대리 이하 직원들이 단신으로, 해외에 파견되었다. 양성 인력은 향후 해당지역의 주재원에 활용한다는 취지였다.


당시 국내에 유사 사례는 거의 없었다. 1980~90년대만 해도, 학생들의 어학연수나 일반인의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 직원들은 누구나 가고 싶어 했다. 내가 일본에 연수를 간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나를 망토 입고 떠나는 도쿄 유학생에 비유하셨다. 1994년 지역전문가로 선발될 무렵, 나는 결혼을 했다.


지역전문가 파견 전 집합교육을 3개월 동안 받았다. 나는 50명의 일본지역 연수생 중 1등으로 교육을 마쳤다. 당시 내 어학실력은 하위 1/3 정도 수준이었지만, 다양한 교육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 수료식에서, 나는 연수원장 상을 받았다. 창립기념일 모범상 이후로는, 삼성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단신으로 일본에 갔다.


쯔네이시 연수소

일본에서 첫 3개월은, 후쿠야마의 쯔네이시 연수소(삼성과 협력관계에 있던 쯔네이시 조선소의 연수시설)에서 지냈다. 50명의 일본 연수생들이 4개 반으로 나뉘어, 연수소에서 일본어를 공부했다. 주중에는 학교와 기숙사를 걸어서 다녔다. 주말에는 시내 외출(버스로 1시간 거리)이 허용되었다. 그때 삼삼오오 나가서 쇼핑도 하고, 술도 한잔하고 기숙사에 돌아왔다.


함께 외출했던 동료 중에 삼성생명 소속의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일본어 실력이 가장 낮은 반에 있었다. 술을 한잔하고 돌아올 때, 택시 기사와 일본어 대화는 그 친구의 독차지였다. 우리가 놀랐던 것은, 다음날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어 수업시간에는 평소처럼, 침묵을 계속 유지했다고 들었다. 이 정도면 미스터리 아닌가?


기숙사에서 50명이 생활하다 보니, 다양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한 친구는 머리 깎는 기계(이발기) 세트를, 아예 한국에서 준비해 왔다. 주말에는 기숙사 목욕탕의 옷 갈아입는 곳에서, 일정 금액을 받고 동료들 머리를 깎아주었다. 게다가 한국 카세트테이프를 틀어주면서, 향수병(?)에 걸렸던 동료들의 마음도 달래 주었다. 참 독특했던 친구였다. 산골에 있다 보니, 머리를 맡기는 동료도 더러 있었다.


나는 주말 시내에 나가서, 한 달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다. 내가 갔던 곳은 조그만 가게였다. 머리 깎는 의자에 앉자, 아주머니께서 메뉴 판 같은 것을 주셨다. 그곳에는 헤어 스타일 그림이 있었고, 본인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일본어 문구도 적혀있었다. 농아 부부가 이발소를 운영했는데, 나는 3개월 내내 그곳에서 머리를 깎았다. 기숙사에서 호객했던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가게가 짠해서 바꿀 수 없었다. 미안했다, 친구야!


나는 연수소에서 노트북으로 매일 일기를 썼다. 단조로운 생활이었지만 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쓰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일기는 일본에 있는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입국해 도쿄에서 구입했던 경영서적 한 권을, 통째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번역도 연수소를 마치고, 도쿄에서 마무리했다.


한국에서 출간까지 염두에 두고, 저자를 신주쿠에서 만나 저녁식사도 같이 했다. 그분은 한 중견기업의 부장이었는데, 몇 권의 책을 썼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부장급 정도되면, 자신처럼 책 몇 권 정도 만드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말했다. 우리와는 조금 달랐고, 배울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베 지진

쯔네이시 어학연수 기간 중 한신 대지진(6,300명 사망, 1,400억불 피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진도 9 이전까지 일본 최대지진)이 고베에서 일어났다.


지진이 있던 그날 새벽, 기숙사의 어수선했던 상황이 아직 기억난다. 잠을 자는데, 심하게 기숙사 바닥이 흔들린다는 느낌에 벌떡 일어났다. 연수생 모두가 복도로 나와 웅성거렸다. 진도 7.2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잠시 후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잠시 후 아침 TV 긴급뉴스에서는 무너진 고가도로, 폐허가 된 고베의 모습을 영상으로 실시간 송출하기 시작했다.


고베와 우리 기숙사는 직선거리로 200㎞나 떨어져 있었다. 고베지진 발생 이틀 뒤, 연수생 전원은 봉사활동을 가기로 그룹에서 결정되었다. 일본본사 주재원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봉사가 정해진 것이었다. 현장까지 육로 진입이 불가능해, 우리는 고베항까지 배로 이동했다. 그리고 봉사활동의 거점인 고베시청까지, 정말 산 넘고 물 건너서 어렵게 도착했다.


당시 국내외에서 보내온 보급품들이, 고베시청에 모두 보관되었다. 나는 그 물품들을, 피해주민에게 송출하는 프로세스에 배정되었다. 식사는 시청 야외에서, 일본 자원 봉사자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으로 해결했다. 일본 여러 곳에서 온 봉사자들과, 중간중간 이야기도 나누었다. 식사 후에는 고베시청 주변도 산책했다.


여진이 정말 무서웠다. 우리가 잠자던 실내 체육관에서도 깨어나, 몇 번이나 대피해야만 했다. 체육관의 큰 천정 조명들이, 여진 때문에 우리 얼굴에 떨어질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고베는 일본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지진은 이 도시를 무참히 짓밟았고, 오랫동안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지진 봉사 후, 나는 ‘후쿠야마 외국인 일본어 스피치대회’에 특별 연사로 나섰다. 그곳에서 고베 지진 봉사 활동했던 내용을, 일본어로 10분 정도 발표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발표자를 모집할 때, 용기를 내어 지원했다. 약 3주 동안 일본어 선생님의 코칭을 받으며 원고를 만들고, 발표 리허설도 수차례 가졌다.


당시 내 일본어 수준에서는 무리였지만, 원고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 잘 마쳤다.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정말 좋은 공부가 되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도전하면, 성취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일본에서 지진의 공포감을 확실히 느꼈다. 당시 고베의 처참했던 광경들은, 아직 내 눈에 선하다. 이후 도쿄 일본어학원 수업 도중에, 큰 지진이 두어 번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이 얼굴이 하얘지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던 모습도 기억난다. 일본인들에게 지진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잠재된 극도의 공포심 그 자체다.


지역 미술관

연수소 친구들과 주말에 기차를 타고, 인근 와카야마현에 당일치기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도쿄도 아니고 한적한 시골인데, 관람하는 사람들로 미술관이 엄청 붐볐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미술관의 소장품들이, 중고등학교 미술 책에서 봤던 명화들로 즐비했다.


잘 이해가 안 되어, 다음날 쯔네이시 연수소의 한국 선생님(현지 대학교 일본어 박사과정)에게 물어봤다. 1970~80년대 일본 경제가 한참 좋을 때, 일본이 해외 명화들을 많이 사 모았다고 답해 주었다.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몇 차례 지역연구를 할 때도 느꼈지만, 일본의 어떤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홋카이도의 조그만 미술관에서도, 명화들이 즐비했다. 정말 대단했고,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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