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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만사 - 조셉 퓰리처

시상인 02

by 구포국수

조셉 퓰리처 (1847 ~ 1911)

기자정신의 대명사였던 퓰리처는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에 기부금을 냈다. 말년에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자정신을, 이 상을 통해 지금까지 후배 기자들을 격려한다. 미국의 기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쉽다.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노벨상을 관리하고 있다면, 퓰리처상은 뉴욕시에 있는 콜롬비아대학에서 매년 5월 시상을 주관하고 있다. 이 상은 미국인에 국한되어 운영되어 있으며, 매년 언론분야 14개와 음악/미술 분야 7개에 대한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미국 조셉 퓰리츠가 컬럼비아 대학 신문학과에 기부했던 50만불 기금을 모태로, 1917년부터 시상되고 있다.


조셉 퓰리처는 헝가리계 미국인이다. 1864년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의 외인부대 용병 모집공고를 보고 대서양을 건넜다. 항해 중 선원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오지에 일당 노동자로 보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다에 뛰어들었고, 3시간 동안 나무조각을 잡고 헤엄쳐 간신히 미국에 도착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북군에 200불을 받고 외인부대에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계 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부자와 정치인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자생활을 했다. 미주리주 의원과 자신이 다니던 언론사 CEO까지 하면서 언론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1883년 망해가던 언론사 ‘뉴욕 월드’를 인수해 회생시켰다.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자유의 여신상이 파리에서 완성되었지만, 운반비용과 재조립 비용 문제가 생겼다. 이때 그가 인수한 뉴욕 월드에서 모금운동을 해, 그 비용을 마련했다. 그는 뉴욕 월드를 발행부수 1위의 언론사로 만들었다.


이후 뉴욕월드에 대항하는 한 언론과 치고받는 난타전을 벌였고, 기자정신이 많이 훼손된 채 은퇴했다. 1885년 뉴욕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의 기부금으로 1903년 컬럼비아대학에 신문학과가 창설되었다. 1917 년부터는 퓰리처상이 운영되고 있다.


그는 용병을 지원해 머나먼 나라의 바다에 뛰어들었고, 남북전쟁에 참여했고, 매서운 기자 정신으로 권력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이다. 왕성했던 그의 에너지가 황색 저널리즘의 소용돌이를 한바탕 겪고 나자, 초심으로 돌아가 참 언론인의 양성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나는 2022년 서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진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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