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 도착해 피곤했지만 친구와 근처 시장에 가기 위해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어. 다른 나라에 가면 꼭 그곳 시장에 가보라고 하잖아. 다행히 우리 숙소 근처에 큰 시장이 있더라고. 와로롯 시장이라고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종합쇼핑몰 같은 시장이야.
숙소 주변 분위기가 어떤지 볼 겸해서 우리는 시장까지 걸어가기로 했어. 걸어가는 동안 길가에 마구잡이로 피어 담벼락을 감싸고 있는 풀과 나무들이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연신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어. 똑같은 초록인데 유독 이곳에 식물들은 감성이 묻어나는 이유가 뭘까? 시장 가는 내내 나의 눈과 손이 바빴어.
가만 보니 식물들이 잎이 좁고 길쭉한 게 많더라고. 아무래도 태국이 열대 기후라 햇빛이 강하고 습도가 높기 때문에 잎이 좁은 식물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 것 같았어. 이렇게 잎이 좁은 식물들은 수분 증발을 줄이고 강한 햇빛 아래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식물들이 태국의 풍경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줬어. 태국 사람들은 동물과 자연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한국이면 벌레 걱정에 아예 뽑아버리거나 약을 치거나 그냥 보기 좋은 하단을 인위적으로 만들었을 테니 말이야.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식물들조차도 치앙마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서 좋았어.
와로롯 시장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옷을 샀어. 치앙마이에 오면 꼭 코끼리 바지를 입겠다고 다짐했었거든. 코끼리가 그려진 초록색 셔츠와 반바지 세트를 샀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너무 마음에 들었어. 왜 사람들이 코끼리 바지를 입는지 알겠더라고. 엄청 가볍고 색깔도 다양해서 원하는 대로 입을 수가 있지. 이곳은 너무 덥기 때문에 가벼우면서 햇빛을 가려주는 옷이 최고야. 그리고 자주 빨아야 하기 때문에 너무 비싸도 부담스럽지. 그런 면에서 코끼리 바지가 딱이야.
시장에는 야채, 과일, 반찬, 기념품, 옷 등 여러 가지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첫날이라 너무 정신이 없었어. 10년을 한곳에서 살다가 새로운 곳에 오니 생각보다 적응이 더디더라고. 필요한 게 생각나면 나중에 다시 들리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어.
치앙마이에서 꼭 먹어야 하는 치킨 맛집이 있대. 그래서 친구랑 그 치킨집에 가기로 했어. 오전에 시장만 다녀왔는데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샤워를 하고 새로 산 코끼리 옷으로 갈아입었어. 그리고 그랩 택시를 불러서 님만 해민으로 왔지. 이곳에 위치안부리 로스트치킨이라고 하는 맛집이 있거든. 간판도 없는 허름한 건물인데 내부는 넓고 사람은 많더라.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이 동네를 다 덮을 것만 같았어. 그만큼 장사가 잘되는 집이야. 숯불에 닭을 통째로 구워서 반마리 또는 한 마리로 판매를 하는데 숯불에 구운 닭인데도 어쩜 그렇게 부드러운지. 닭가슴살을 좋아하게 됐어. 치앙마이 오게 된다면 꼭 먹어봐! 치앙마이에서의 첫 식사이자 첫 외식인데 너무 맛있어서 행복했어. 쏨땀이랑 옥수수 샐러드 그리고 스티키 라이스도 같이 주문했어. 솜땀은 처음 먹어봤는데 엄청 상큼한 파파야 샐러드야. 치킨이나 기름진 음식이랑 같이 먹으면 환상의 궁합이야.
친구와 나는 배부르게 먹고 걸어서 마야몰로 가 한 달짜리 USIM을 구매했어. 마야몰은 흔히 보는 쇼핑몰이야. 브랜드 옷, 신발, 가방부터 푸드코트까지 있어. 우리는 간단히 구경하고 맞은편 Think Park로 가 커피 한 잔을 마신 다음 수제 다이어리를 사고 또 근처 마트로 갔어. 두 달 동안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지. 샴푸, 린스, 바디워시부터 생수와 휴지까지. 이 쯤되니 나와 친구는 지쳐서 말이 없어졌어. 최대한 빠르게 장을 보고 숙소로 가 쉬고 싶을 뿐이었어. 하지만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마지막 일정을 위해 짐을 놓고 밤길을 나섰어. 미리 찜해둔 헬스장에 등록하러 가야 했거든.
이쯤 되니 여기가 한국인지 치앙마이인지 헷갈리더라. 짧은 기간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할 것도 있었지만 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온 지 채 24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오늘은 여행이 아닌 일상처럼 하루를 보냈어. 여행 오기 전 나의 로망은 소파에 누워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가끔씩 수영하는 힐링을 꿈꿨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ㅎㅎ숙소에 가만히 누워서 쉬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나이를 먹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후회와 미련이 가득한 날들의 연속이었어. 그리고 죽는 순간을 상상해 봤지. 과연 내가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싶더라고. 그리고 이후부터는 미래로 가서 오늘을 바라봐. 그리고 일말의 후회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됐어. 그래서 너무 바쁘게 살았나 봐. 여기까지 힘들게 와서 아무것도 안 하려니 이 기회가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 그런 나에게 이번 여행은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느껴.
이 여행은 그동안 내가 잊고 지냈던 여유를 다시 찾기 위한 중요한 기회라는 걸, 오늘 하루를 보내며 더 확실히 느꼈어. 치앙마이에서의 첫 외식, 쇼핑, 그리고 헬스장 등록까지… 분주하게 흘러간 하루가 내가 꿈꿨던 느긋한 여행과는 달랐지만, 그마저도 나의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깨달았거든.
가만히 쉬기보다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어쩌면 여행도 평소의 일상처럼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달라. 익숙한 한국이 아닌, 낯선 이국의 치앙마이에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으니까. 여유를 배우고,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이 될 거야.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 그리고 내가 몰랐던 여유를 찾아가며 앞으로 펼쳐질 치앙마이에서의 시간들을 기대해보려고 해. 물론, 앞으로도 바쁘게 움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그 속에서 나를 찾고, 다시 한번 삶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데에 있는 거니까.
아직 시작일 뿐이니까, 천천히 나의 속도를 맞춰가며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겨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