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커리어 3

웹소설 작가

by 한량



데이터 레이블링 일이라는 것이 바쁜 시즌. 즉, 일이 몰리는 시기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일이 몰리지 않는 시기엔 꽤나 여유롭다는 것이다.

성향상 자유로운 프리랜서가 잘 맞고 한량의 기질이 낭낭하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굶어 죽기야 하겠냐'라는 한량마인드로 주구장창 글을 읽었다.

아니, 글을 포함한 콘텐츠들을 폭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뭐에 씐 것처럼 밤을 새우며 이것저것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일본 애니와 웹소설을.


좋아하는 게 생기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오타쿠 같은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재밌는 콘텐츠를 발견하면 그 콘텐츠를 씹고 뜯고 맛보는 것은 기본이요,

그와 비슷한 장르와 스토리라인을 가진 작품이 있다면 그것까지 씹맛뜻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어릴때야 돈이 없어서 유료콘텐츠를 마음놓고 보지 못했다만은

이제는 성인! 돈 꽤 버는 성인!이 되었으니

뭐가 문제랴.

작가들이이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제발 건강챙기고 연중만 하지 말라달라는 것이 유일한 소원인 유저가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다수의 결제로 받은 고퀄의 콘텐츠들로 밤 새우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였다.


하아

밤새고 만족감 얻은 배부른 고양이만 되었어도 참 좋았으려만

젊었을 때도 못 새던 밤을 30 초입에 새우니 결국 몸에서 경고신호를 보내왔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며 추운데 손발에선 축축하게 땀이 나기 시작한 것.

이를 이상히 여긴 엄마는 당장 나를 병원에 데려갔고

'자율신경계 이상'과 '갑상선 저하증 초기'라는 검사결과를 받게 되었다.


의사님께서 잘 먹고 제때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데

솔직히 '그게 가능한가?'라는 비뚤어진 마음이 먼저 솟은건 비밀이다.


팔팔한 시간대에 원치 않은 일(4대보험 고용직)로 에너지 다 빼고

인체리듬에 맞는 취침시간을 가정했을때

겨우 남은 자유시간은 3시간 남짓.

이 안에 좋아하는 것을 모두 때려 넣으라니.. 너무 가혹하게 들렸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용감하지 못했다.

나도 내 건강 소중한 건 아니까..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10시 취침을 노려보았다.

애써 눈을 감고 양도 불러보고 아이유 님처럼 사과나 포도도 확대하여 관찰하려 해 보고

잠 잘 오는 주파수를 들어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고 눈만 감고 있던 그쯤,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난장.


머릿속에서 캐릭터 설정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면서 끊기지 않는 스토리가 막힘없이 뻗어가기 시작했다.

단연코 자부할 수 있다. 30여 년을 살아온 인생동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이 생각이 뻗어나갔다.

그렇게 난 새벽 1시까지 떠오르는 생각에 뇌를 얹어둔 채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노트북을 가지고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꿈처럼 잊어버릴 줄 알았던 이야기가 눈을 뜨고도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카페로 향했다.

매일 글을 썼다.

어디에 올릴지도 누구에게 보여줄지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글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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