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초 학부모들

지은씨 이야기 (3)

by 나나

그렇다. 늘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위치에 있다는 게, 자신이 그 호의에 감사해야 한다는 게 신경쓰이는 거였다. 예희씨가 모두를 VIP 라운지로 이끌기 시작한 뒤부터, 이 모임은 점점 예희씨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끔 라온이가 셔틀버스를 놓치는 날이면 모두 다같이 승차장에서 예희씨를 기다렸다. 라온이를 차로 학원에 데려다준 예희씨가 쌩하니 나타나면 모두 예희씨 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차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대신 백화점 건물 발렛파킹으로 직행했고, 그러면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청년들이 나와서 차 문을 열어주었다.


이 백화점은 대형 쇼핑몰과 주차장을 공유하기에 차를 끌고 갈 때마다 주차전쟁을 겪어야 하는데, 예희씨와 함께하는 백화점 나들이는 편하고, 빠르고, 쾌적했다. 이런 식이니 다들 예희씨의 지각을 오히려 반기는 것 같았다. 오늘도 지각이라고, 라온이를 데려다주고 오겠다는 예희씨를 다 함께 기다리는 동안 지은씨는 생각했다. 보통은 한 명이 늦으면 나머지는 먼저 앉을 데로 이동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왜 한 명을 위해서 나머지 모두가 여기서 대기해야 하는 거야? 불만이었지만 차마 표명할 수는 없었다.


가끔 예희씨가 컨디션 핑계를 대면서 커피 모임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미안하다면서, 자기 없이 라운지 가라고, 앞에서 문자하면 자기가 문 열어주겠다고- 어플로 문 여는 거라서 원격이라도 상관없다면서- 가서 자신은 금방 온다고 둘러대고 커피 마시고 오라면서 말이다. 그러면 미영씨가 나서서 손사레를 치곤 했다.


“아니야, 됐어. 라온이 엄마 없이 우리끼리 가기도 민망하고….”

“그래. 오늘만 날인가, 금요일에도 우리 모일 거잖아? 난 시간 생긴 김에 분리수거나 해야겠다.”

“아휴, 나도 할 거 많아. 우리집 완전 돼지우리야….”


지은씨가 일이 있다고 빠질 때는 다들 아쉽다고 손 흔들며 배웅하고선 셋이서 백화점으로 종종 향하곤 했다. 지은씨는, 왜 예희씨 없으면 안 되냐고, 우리끼리 카페 가자고, 저기 제주도에서 유명한 카페 팝업스토어 생겼다고,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번에도 속으로만 삼켜야만 했다.


지은씨는 H 백화점의 VIP 선정기준을 찾아보았다. 가장 낮은 등급이 3천, 그 다음이 5천, 가장 높은 게 7천…. 서울의 백화점에는 더 높은 등급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이 동내에서는 7천으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웬만한 대기업 세후 연봉 수준 아닌가. 그걸 그대로 백화점에 갖다바칠 사람이 이 동네에 몇이나 있겠냔 말이다. 지은씨가 받는 생활비가 월 500이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기도 전에 이건 안 되는 거였다.


지은씨는 우울했다. 더 이상 자신에게는 어디 가서 대접받을만한 재력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명문대 출신 남편은 이제보니 정년퇴직까지 버텨내야 하는 월급쟁이일 뿐이었다. 남편이 갖다주는 생활비를 모조리 백화점에 갖다 바쳐도 지은씨는 예희씨보다 낮은 등급의 VIP만 될 수 있었다. Very Important Person, 매우 중요한 사람이지만, 예희씨보다는 덜 중요한….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06화호수초 학부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