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씨 이야기 (1)
요즘들어 지은씨에게는 사소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매주 월수금, 아이들을 학원 셔틀버스에 태우고 엄마들끼리 바로 근처 백화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게 루틴으로 자리잡았는데, 매번 예희씨에게 얻어먹기만 한다는 거였다. 예희씨는 H 백화점 VIP였다. 그것도 꽤 높은 등급이었다. 매번 7층의, 이 백화점에서 가장 좋은 라운지를 이용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모이는 엄마는 늘 넷이었는데, 라운지에서는 VIP 뿐만 아니라 그 동행인들에게도 음료가 제공됐다. 9층 문화센터 옆에서 생색내듯이 나눠주는, 원가절감을 기준으로 선정한 게 뻔히 보이는 싸구려 머신 커피가 아니라, 갓 내린 에스프레소로 만든 라떼나 생과일 주스같이 카페에서 돈 주고 사먹어도 손색없을 법한 음료를 제공했다. 무료로 말이다.
“어머, 여기 너무 좋다. 백화점에 이런 데가 있었네.”
백화점 VIP 라운지에 처음 와 봤다는 소라씨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예전에 무슨 이벤트로 라운지 이용 쿠폰을 받아 두어 번 방문해 본 적 있다는 미영씨도 옆에서 거들었다.
“라온이 엄마 덕분에 여기를 이용하네. 더는 들어올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우리랑 와도 괜찮아? 라온이랑 같이 와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어차피 여기는 애들은 못 들어오거든.”
“메뉴에 키즈 음료가 있는데.”
“테이크아웃 전용이야. 아유, 애랑 백화점 같이 오면 너무 피곤해. 나도 한숨 좀 돌리자.”
지은씨는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지은씨의 어머니도 H 백화점은 아니지만, 다른 백화점의 VIP였던 것이다. 연말마다 내년엔 무슨 등급일지가 지은씨 어미니의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구매실적이 모자라면 등급을 맞추기 위해- 지은씨 어머니는 원래 필요한 물건인데 조금 미리 살 뿐이라고 강조했지만- 쇼핑을 나서는 일도 왕왕 있었다. 한 번은 연말에 바빠 쇼핑을 못 해 등급이 내려갈 뻔했는데, 백화점에서는 그래도 그간의 실적을 보아 등급을 유지시켜 드리겠다고 했다. 구매실적이 VIP 선정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고, 유도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알게되고 나서야 지은씨 어머니는 연말마다 단골 매장들을 찾아다니며 세일 행사 일정을 따져가며 구매 계획 컨설팅에 골머리를 썩는 대신 연말 분위기를 즐기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지은씨 어머니는 5천 만 원 이상 실적을 쌓야아 하는 등급이었는데, 동행인 두 명까지 음료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즉, 어머니와 지은씨, 그리고 지은씨의 동생, 이렇게 셋이 백화점에 가면 딱 맞는 인원이었다. 더 이상은 낄 수 없었다. 그러면 라운지 이용을 못 하니까. 가끔 지은씨의 아버지가 백화점 동행을 원할 때, 지은씨 어머니는 라운지에 못 가니 어디 갈 데가 없다며 푸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지은씨는 눈치껏 자신은 안 가도 된다고 빠져주는 역할이었다. 아니, 왜 애매하게 3명 까지만 입장 가능하대, 보통 이런 건 4인 기준 아닌가, 테이블이랑 의자는 다 4인용으로 배치해놓고서…, 투덜대면서 말이다.
한 번은 지은씨의 어머니가 평상시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에 선정된 적 있었다. 그 지점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지은씨가 결혼할 때, 혼수를 마련하다보니 몇 천 실적이 더 쌓였던 것이다. 그 때 이용했던 9층 라운지가 지금 예희씨와 함께 오는 라운지와 비슷했다. 애들 출입 금지, 직접 갈아주는 생과일 주스, 동행인 세 명 포함 총 네 명까지 이용 가능…. 백화점 VIP 시스템이 돌아가는 체계는 다 고만고만하다는 걸 고려했을 때, 예희씨는 그 때 지은씨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 백화점에서 가장 높은 등급 VIP일 것이다. 서울이라면 몰라도, 근교 신도시에서는 꽤나 대접받을 법한 재력을 갖춘 셈이다.
처음부터 예희씨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정도 짐작은 했었다. 애 엄마들 중 명품 옷을 휘감고 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 중 한둘은 너무 짝퉁 티가 나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예희씨는 태가 났다. 부유하게 자란 지은씨는 동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진짜라고. 가짜가 한 둘 섞였더라도- 지금 지은씨가 매고 있는 스카프처럼 말이다- 대부분은 진품일 거라고. 라온이 아버지가 수요일마다 쉰다길래, 지은씨는 혹시 라온이 아버지가 의료 쪽 종사하시냐고 물어봤다. 수요일마다 쉬는 게 병원뿐이겠냐마는, 훤칠한 키에 눈에 띄게 예쁜 예희씨의 미모를 고려했을 때 남편 직업이 뭐라도 될 것 같다는 게 지은씨의 추측이었던 거다. 예희씨는 수줍게 웃으며 라온이 아빠가 한의원을 한다고, 혹시 한약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얘기해 달라고 했다. 역시나. 지은씨는 예희씨와 친하게 지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혹시라도 라온이네가 자기네보다 잘 사는 게 아닌가, 불안감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