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광로에 들어선 나

불순물을 걷어내고 더 단단해 지다.

by 치아쌤 CHIA ssam

가끔 그런 시기가 찾아옵니다.
익숙한 모든 것이 조금씩 낡아 보이고,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이상하게 아니다 싶게 느껴지는 순간들.
내가 만든 건데도, 어느 날부터는 그 안에서 숨이 차요.

요즘 나는,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 용광로 안으로 들어선 느낌.

모든 걸 태워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싶은 충동이 강해졌습니다.
그게 관계든, 일의 방식이든,
혹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든 말이에요.


나는 이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지금까지 23년 동안 치과의사로 살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진료하고,
어떤 날은 감동했고, 어떤 날은 지쳤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일이 좋습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조금 더 환하게 바꿔주는 일,
삶의 자신감을 만들어주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 일을
더 오래, 더 즐겁게,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바꿔야 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늘 해오던 방식이 편하긴 했지만,
그 편안함이 나를 조금씩 무디게 만들었고, 눈감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만든 구조를
내 손으로 다시 부수고,
다시 짓는 중입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재배열되는 과정

조직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와 맞지 않던 것들을 조용히 떠나보내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내 안의 불순물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럭저럭 괜찮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과 ‘진짜 원하는 것’의 차이를
이제는 조금 더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 내 주변은
더 심플해졌지만, 더 명확해졌습니다.
적어도 내게 진심인 사람들과
내가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바닥까지 데워지는 시간

용광로는 불편합니다.
뜨겁고, 버겁고, 때론 고립감마저 느껴집니다.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습니다.

하지만 알죠.
이 고온의 시간을 지나야만
내가 정말 원하는 온도로,
내가 사랑하는 이 일을 다시, 더 오래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다 내려놓은 뒤, 더 단단한 나로

지금 나는,
새로운 진료실 구조를 짜고 있고
나와 방향이 같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보다
무언가를 정리할 때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지금 이 시간에야 깨닫고 있어요.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결국
더 오래 이 일을 사랑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걸
매일 조금씩 확신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10년 뒤, 아니 5년 뒤에 누군가가

“그래서 더 빛나는구나.”

생각한다면,
지금 이 용광로 속의 시간도
충분히 의미 있었던 날들이겠지요.


2025.11.25 안성 치아쌤 박선영

작가의 이전글2025년 11월 가을의 끝자락, 변화의 소용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