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 하면 떠오르는 큰 건물들이 있다.
지금은 이전하고 없지만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있었고,
또 지금은 억 소리가 나는 주거단지가 있는 자리에 외인아파트가 있었다.
강남에서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는
하얏트호텔도 있다.
그중에서 가장 자주 앞을 지나다녔던 건물은
순천향병원이다.
순천향병원은 대학병원이다. 어릴 적 아무리
아파도, 축농증이 심해도 우리 집은
동네 작은 의원에 다녔다.
당연하지, 크게 아픈 일이 없는데
대학병원에 가겠나!
순천향병원은 나에게 큰 화장실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 높은 한남동 고지대에서
한남초등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손목시계도 없이 학교를 가면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건 함께 걸어가는 아이들의 수였다.
아이들이 너무 적으면 늦은 거다.
아침을 꼭 먹어야 하는 나,
꼭 먹어야 하는 엄마는 아침이 항상 바빴다.
휘리릭 엄마가 챙겨주는 아침을 먹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온다.
다다다다다다.....
언덕길은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다.
한참을 내려오면 장운동이 잘되었는지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하지만 학교까지는 아직 멀었다.
보통 그 지점이 순천향병원쯤이다.
그때부터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말했다.
학교 갈 때마다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학교가
멀어서 너무 힘들다고 투정 아닌 부정을 부렸다.
"순천향병원 화장실에 가."
유레카!!!
초등학생인 나는 병원이라는 큰 건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모닝 화장실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엄마가 신장 투석을 시작하고 혈관 문제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 투석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순천향병원에도 류머티즘내과가 생겼다.
처음 엄마가 병을 알게 되었을 때는
가장 유명한 병원이 한양대학병원이었다.
엄마가 걸을 수 있었던 건
병원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한 번씩 병원에 가서 반나절을 기다려진료를 받고 한 꾸러미의 약을 받아왔다.
약의 종류는 어찌나 많은지,
엄마는 약으로 배채운 다고도 했다.
약은 양날의 검이었다.
그 힘들게 시작되었던 2013년 새해부터 엄마의
입원과 퇴원은 계속 반복되었다.
투석은 일주일에 세 번 있었다.
병원도 옮겼으니 기왕이면 이 세 번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다녔으면 하는 마음에 병원 앞으로
집을 옮겨보려고도 애써봤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일을 하는 중간중간 엄마를 돌봤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엄마를 볼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우리 가족이 항상 이야기하는 한남동이
서울의 중간에 있었기에
나는 회사와 거래처를 오가며 엄마를 볼 수 있었다.
그해 여름, 사촌언니가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
나보다 8~9살이 많은 언니였다.
암이 재발되어 입원한 상태였다.
엄마와 나는 언니를 보려 병실로 가려고 했다.
엄마가 자기 몸이 성치 않은데 언니를 보러 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는지 더 묻지 않았다.
언니를 보러 언니 병실로 갔다.
언니는 여느 때처럼 젊고 예뻤다.
다만 입에 산소호흡기를 달고
나를 바라보지 못할 뿐...
언니의 손을 잡았는데 나도 모르게 기도만 나왔다.
기도를 마치고 큰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딸의 돌봄을 받는 엄마,
딸을 돌보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지며 마음이 쓰렸다.
다음날 언니는 하늘나라에 갔다.
그리고 그해 가을, 엄마도 순천향병원에서
우리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마와 병원 앞에서 만나 투석하기 전
몰래 먹었던 짜장면,
답답한 병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나와 돌고 돌았던 병원 주변의 골목들,
이제는 그때가 꿈결 같다.
뿌연 구름 속 이야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