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마당이 있는 큰집 골목 시작엔 연립주택이 새로 지어졌다.
한남동에 살며 아파트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시절, 연립의 집 구조는 신세계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서면 거실과 부엌, 방, 화장실까지 모두 집 안에 있었다.
한 번은 엄마가 ‘새댁’이라고 부르는, 연립에 사는 아주머니집에 심부름을 간 적이 있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집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젊은 아주머니가 밝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엄마의 용건을 대신 전하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아니 하드를 하나 꺼내 주신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온 나,
나는 연립주택에 대한 로망이 생긴다.
아무리 몸이 아파서 큰 집에 살고 있었지만,
큰집과 사는 일이 엄마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큰집 눈치 보는 일이었을 거란 걸 성인이 되어야 알았다.
눈치 없고 둔한 아빠도 더 이상 함께 사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4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빠는 어린 나를 데리고 공마당을 지나 한참을 올라간다.
저 멀리까지 보이는 긴 경사로의 반쯤 올라가서 우리는 오른쪽 또 다른 경사로를 오른다.
조그마한 부동산과 구멍가게를 지나 두 사람 지나갈 만한 골목에 들어선다.
골목에서 두 번째 집, 세 번째 집이 끝인 짧은 골목이다.
대문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 집에 들어선다.
작은 방이 하나 있고 방에서 이어진 계단 두 개로 푹 꺼진 아궁이가 있는 작은 부엌,
다시 계단을 올라 처음 방보다 더 작은 방 하나, 이 집이 우리 첫 집이다.
아빠는 내게 그 집을 구경시켜 주며 집이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5학년이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집의 선택권을 준 것처럼 묻는다.
“우리 이 집을 사려고 하는데 네 생각을 어때?”
아빠는 항상 나를 아들이라고 여겼다.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사촌 오빠들 사이에 나도 꼭 함께 서서 절을 했다.
우리 집은 내가 아들이니 절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의 대들보라고도 했다.
그게 뭐라고 나는 어디 가서도 기죽는 일은 없었다.
우리 집의 대들보니까 당당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500만 원짜리 우리 집을!
사실 아빠는 돈이 없었다.
이 쓰러져 가는 집을 누구에게 소개받았는지는 몰라도 500만 원이면 덤벼 볼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덤빌 수 있는 언덕은 엄마였다.
엄마는 어디에서도 나름 인기가 좋았다.
몸이 아프고 형편이 어려웠어도 궁색하게 생활하거나 어두운 부분이 전혀 없었다.
힘들 때마다 돈을 빌려주던 숙향이 아줌마, 이번에도 아줌마가 돈을 빌려 준 이유는
돈을 버는 아빠 때문이 아니라 제날짜에 돈을 갚는 엄마 때문이었다.
아빠는 집을 내게 보여주자마자 집을 계약했고 그 집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엄마가 숙향이 아줌마에게 받아 온 500만 원으로 우리의 첫 집이 생겼다.
집으로 이사 가기 전, 아빠와 나는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집이 작고 어설프게 생겼어도
아빠는 아픈 엄마가 아궁이가 있는 부엌을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가장 먼저 우리가 한 일은 현관의 턱을 깎아내고 그 흙으로 깊은 부엌 바닥을 메우는 일이었다.
4학년이었지만 나는 우리 집의 대들보였으므로 아빠를 도와 열심히 돌을 나르고 흙을 나른다.
이 집의 정말 특이한 점은 창문이 정말 작다는 거였다.
물론 집이 작으니 창도 작았겠지만 보통의 집의 창문 크기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전에 살던 집주인은 맞붙어 있는 앞집과 사이가 안 좋아서 창도 제대로 없었다고 했다.
집이 오르막 골목에 있었기에 우리 집은 앞집의 옥상과 높이가 같았다.
전 주인이 창을 내는 것을 앞집이 허용해 줘야 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창을 만들다만 자국도 남아 있었다.
처음 아빠와 그 집에 갔을 때 더욱 어둡게 느껴졌던 이유가 바로 창 때문이었다.
아빠와 나는 부엌을 만들고, 창을 만든다.
엄마와 도배지에 풀칠을 하고 작은 집에 포장지를 씌우듯 도배지를 붙인다.
우리에게도 작은 보금자리가 생겼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 없는 밤, 동생이 태어난 보광동 문간방을 지나,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신원동을 지나,
그 아프고 시린 공마당 막다른 골목집을 지나,
엄마와 아빠, 동생과 내가 사는 500만 원짜리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