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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 컵라면

by 모나리자

큰집이 있는 골목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같은 골목에 살았지만 유독

우리 집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살고 있는 집의 생김새만 봐도 그렇다.


공마당에서 시작된 골목은

막다른 길 끝에 있는

큰 집으로 올수록 점점 폭이 좁아졌다.

마지막 큰 집 앞은 하수구 맨홀 두 개 정도의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맞물려 세 집의 대문이 이어진다.

우리 집을 뺀 두 집은 계단을 올라가야 대문이 있다.

우리가 살던 큰 집 옆엔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성인이어서 인사만 꾸벅꾸벅했던 사이었다.

그 옆집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아이와

세 살 어린 여자아이 남매가 살았다.


계단을 올라서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는 3층 집이었는데 위의 2, 3층은 우리 골목과

다른 위 큰길로 출입구가 있는 구조여서 마당은

이 집 차지였다. 이 집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아저씨는 굉장히 점잖고 유하게 생기셨고

아주머니는 깡마르고 조금은 예민하게 생겼었다.

아이들의 학업에 굉장히 신경을 쓰셨다.

어릴 적 느낌으로는 두 분 다 스마트한 느낌이

있어서 두 분과 만날 때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집의 또 다른 특징은 자가용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 주변엔 자가용을 가진 집이 많지

않았기에 차가 있다는 것은

부자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골목의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와 함께 놀았다. 큰 집엔 나와 한 살 터울인

사촌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골목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다.

고로 오빠는 골목대장이었고

나는 골목대장의 동생이다.

즉, 무서울 게 없다!

남자아이들이 다방구를 하거나 정사각형의

하수구 구멍으로 된 맨홀에서 동그란 딱지를 치거나 팽이 돌리기를 하면 난 그 무리 속에 있었고,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면 그 무리 속에

있었다. 나는 종일 놀았다.


그래도 지킬 건 지킨다.

나는 숙제는 꼭 한다.

왜냐? 혼나는 게 싫다.

숙제를 잘해 가지는 못하더라도

안 하지는 않는다.

엄마, 아빠는 나의 숙제를 봐줄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내가 스스로 챙겨야 했다.


옆집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예쁘게 봐주셨다.

기나긴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우리는 방학

숙제를 하기에 바빴다. 밀린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강아지풀이라도 뜯어다가 붙였다.

그리고 독후감!

나의 모교 한남 국민학교에 계셨던

그 시절 교장선생님은 우리 문화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학교에 시조 짓기 대회가 있었다.

2학년 2학기에 전학을 오고 나서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내게 가장 큰 이슈는

시조였다.

[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음수율을 따른다.

초장 3.4.4(4).4, 중장 3.4.3(4).4, 종장 3.5.4.3의 음절 배열을 갖는다.]


나는 시조 대회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상을 몇 차례 받아 왔다.

골목에서 열심히 뛰어노는 아이들 중에는

상을 받아 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공부도 아니고 시조로 상을 받았다고 골목에서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 살 던 동네에서 1학년 입학하고 교내 산수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너무 좋아하시며

거금을 들여 피노키오라는 브랜드의 책상을 사주셨다.

골목에서 나의 소문은 이때와 비슷했다.

나는 글짓기를 잘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아이들의 방학 숙제 독후감 쓰기는

나의 지도 아래 동네 아이들이 모여 함께 했다.

그때 옆집 아주머니 집에서 아이들이 모여 숙제를 하곤 했는데 그 집의 마당과 거실,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은 넘 볼 수 없는

벽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부러웠던 게 있었으니!

바로 육개장 사발면이다.!


집에서는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봉지로 된 삼양 라면을 끓여주셨다.

물론 엄마가 끓여주는 라면도 맛이 좋았다.

하지만 끓는 물을 부어 그대로 먹는 사발면 맛은

매우 달랐다. 아주머니가 회사에 다니시니

아이들끼리 있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사다 놓은 사발면 묶음 상자는 다른 무엇보다

내겐 부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사발면이 뭐라고 나는 옆집에 가서

방학 숙제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몇 번 사발면을 먹었으면 그만해도 될 것을,

나는 엄마에게 우리도 사발면을 사 먹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왜 우리 집은 봉지라면만 먹냐고,

우리도 사발면 사서 한 사람씩 들고 먹자며 졸랐다. 하지만 엄마는 사주지 않았다.

봉지라면이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며 혼까지 냈다.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봉지라면과

사발면의 가격 차이가 있었다. 100원, 200원 차이였을 테지만 엄마에겐 그 돈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아프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더욱 아빠에게

미안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힘든 시절에 엄마의 병원비까지 아빠 혼자 벌어야 하는 게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우리 눈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빠였지만

엄마는 항상 아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했다.

가끔은 “저 정도 재주로 돈 벌어 와 주니

참 신통해~”

하며 아빠의 솜씨를 은근히 비하했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마음을 다했다.

철없는 큰 딸은 육개장 사발면 하나에

가난을 원망했지만…


난 지금도 육개장 사발면을 보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컵라면인데….

참 이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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