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연합뉴스>
한남동은 남산을 뒤로, 한강을 앞으로 하고 자리
잡은 배산임수의 풍수 지리라 했다.
그래서 재벌들이 산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한남동은 산기슭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였다. 최근 새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고
해서 모두 이주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보았다.
"자고로 진정한 한남동을 논하려면 내가 살던 산동네를 가보고 논해야 한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한남동에 대한 자부심이다. 한남동이 고향인 것이 자랑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친할머니가 상경해서 자리 잡은 곳이 한남동이었단다. 아빠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로
왔다고 하니 거의 70여 년 전 일이다. 그때만
해도 한남동엔 한강으로 흐르는 천이 있었고,
순천향병원도 없던 때였다.
아무튼 배산임수 한남동 위치는 참 좋았다.
계절마다 남산의 색이 바뀌고 연말마다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보이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
집이 있는 곳도 높은 산이건만 엄마는 그 예쁘기만 한 남산을 바라보지만 않고 올랐다. 더 이상 걷지
못할까 봐 관절 마디마디의 고통을 이겨내며 걷고 오르고를 매일같이 했다고 했다. 그대로 있으면
몸이 다 뻣뻣하게 굳어져 다시는 못 움직일 것 같았단다. 낯선 학교로 전학을 오고, 엄마의 존재는 부재중으로 느꼈던 그 시기,
엄마는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했던 그 남산에서...
우리 집에는 외사촌들이 자주 지내다 갔다.
큰 이모와 둘째 이모가 전라도 부안에 살고 있어서 그곳에서 상경한 사촌 언니와 오빠들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 잠시라도 지내다 가곤 했다.
다들 성인이 되어 서울로 온 터라 사촌들은 나와
나이 차가 많았다. 그래도 언니와 오빠였기에
첫째인 나로서는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게
마냥 좋았다.
어느 명절 때였던가, 여름휴가 때였던가......
언니, 오빠들이 잔뜩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집에 사람 드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아빠는 사촌들을 모두 이끌고 남산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늦은 시간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들은 열심히 걸었다. 짧았지만 각자
우리 집에서 지냈던 추억들을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남산을 돌고 돌아 하얏트 호텔까지
내려왔을 땐, 이미 버스 운행 시간은 끝난 때였다.
결국
힘들게 몇 시간을 걸었던 우리는 버스를 타지
못하고 다시 집까지 걸어야 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우리 가족들은
깔깔거리고 낄낄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끝이 없는 길처럼...
첫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병원에서
심장 소리를 듣고 나서야 엄마에게 알렸다.
결혼은 천천히 하라던 엄마가 서른이 넘어서자,
재촉하기 시작했다. 연애부터 결혼까지
일 년 반(매우 적절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라는 시간을 정리해 준 건 엄마였다.
서른이 넘은 딸이 연애라는 걸 하고는 있는데 도통 연애하는 상대를 볼 수 없으니, 엄마는 답답해했다. 그렇다고 나도 나에게 결혼하자고 덤비지 않는
남자를 끌고 엄마에게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해 엄마가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고관절 수술,
무릎 관절 수술 등으로 몇 차례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그 해는 좀 달랐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를 느낀 지금의 남편은
병원으로 엄마를 찾아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엄마는 퇴원 후 집으로
오라고 약속을 받아 냈다.
그렇게 찾아온 그에게 엄마는
그 흔한 집은 어떻게 할지,
얼마나 모아놨는지
조차 묻지 않았다.
“난 추운 거 싫으니까 10월 안으로 해.”
그렇게 우리는 10월에 결혼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니문 베이비가 생긴 것이다.
원래부터 엄마는 아기를 정말 예뻐했다.
사촌동생이나 조카들을 보면 아기가 이뻐 어쩔 줄 몰라했다. 나의 임신 소식에
엄마는 느낌이 있었다며 아주 기뻐했다.
예정일이 지났으나 아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남편은 정말 남산만 해진 내 배를 뒤로하고 일요일 저녁 대전으로 내려갔다. 주말 부부였던 시절이었다. 저녁을 먹고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내가 집을 나선다.
운동 겸 남산에 다녀오기로 한다.
우리 셋은 또 신이 났다.
예전에 사촌들과 함께 남산을 오르던 그날처럼.
오랜 기간 류머티즘으로 아팠던 엄마는 굉장히
마른 몸이었고 임신 막달인 나는 씨름 선수 같았다. 나는 엄마를 자주 안아주고 업어주곤 했는데 배가 불러 엄마를 안아주기도 힘들었다.
우리 셋은 남산길을 오른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나누고
우리가 만날 아이를
상상해 본다.
예전 엄마가 이를 악물고 걸어 냈던 남산이다.
혼자 힘들게 걸었던 남산을 우리 세 모녀가 함께
걷는다. 내일이면 세 모녀의 그림자가 넷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며…..
그러기엔 내 배는 너무 멀쩡했으므로...
2013년 새해 초부터 우리 가족은 비상이었다.
엄마는 겨울엔 길이 미끄러워 밖에서 걷기 운동을 하기 어려웠다. 남산을 다녔던 시절부터 무릎이
아파도 걷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엄마였다.
엄마는 가녀리고 작았지만 내면은 무척 강했다.
그때도 걷기를 해야겠으나 길이 미끄러워 걱정하는 가족들의 염려를 덜기 위해 엄마는 동네 헬스장에 다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엄마는 헬스장에
갔을 테다. 주말에 올라온 남편과 나는
아이와 장을 보고 있었다.
엄마 전화기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한남동 ㅇㅇ헬스장인데 엄마가 쓰러졌어요.
119를 불렀는데.....”
“엄마 괜찮아요? 의식이 있나요?”
“네, 바꿔줄게요.”
“응 나 괜찮아. 그런데 기억이 안 나....”
우리는 곧장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엄마는 러닝머신에서 걷다가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쓰러지셨다. 얼굴 반쪽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다행히 머리나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일 년 전부터 엄마는 혈액투석을 하고 있었다.
류머티즘 관절염의 합병증 인 아밀로이드증
때문이라고 했다. 신장에 단백질이 쌓여
재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엄마의 병원 생활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팔을 지나는 혈관이 너무 가늘어 투석용
바늘을 일주일에 세 번씩 꽂는 건 무리였다.
엄마는 류머티즘을 치료하러 다닌 한양대학병원을 다녔으나 작은 혈관으로 투석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워 혈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투석 바늘은
꽂지 못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바늘을 빼고도
지혈이 되지 않아 병원에서 한참을 지혈하다
오는 일도 많았다. (투석하는 환자들은 혈액 순환을 잘 되게 하기 위해 약을 먹는다) 신장이 안 좋아지니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도 많아진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으니 악순환이었다.
엄마의 혈관 문제로 순천향병원에서 인공혈관을
만드는 수술을 하면서 투석 치료도 가까운
순천향병원에서 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엄마의 하루 먹거리부터 엄마가 어디를 가는지 누구와 가는지 등을 공유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슬프다거나 힘들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하루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언제나 유머로 함께 나누었다.
엄마는 결코 이 모든 일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4월의 주말 우리 부부와 엄마 그리고 세 살이 된
엄마의 큰 자랑인 아이와 남산에 간다.
꽃들이 만발한 날, 그 좋은 날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꽃구경을 함께 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함께 남산을 왔을 때 보다 더 마르고 힘이 없는 엄마는 여전히
아이를 보고 이뻐죽겠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예쁜 꽃, 그 꽃보다 더 예쁜 손녀의 손을 잡고 엄마는 남산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