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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리자 Oct 23. 2023

하이힐의 아찔함

오늘은 우리 부부의 13주년 결혼기념일이다.

우리 가족은 3년 전부터 결혼기념일에 집 옥상에 올라가서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해마다 사진을 찍어두면 좋은 추억이 될 듯해서다.

오늘 월요일이라 우리는 어제 오후 꽃단장을 했다.

나는 오랜만에 높은 굽의 스웨이드로 된 힐을 신으려고 스커트도 꺼내 입었다.

헌데 우리 남편 거실에서 찍자고 의자배치를 옮겨 놓았단다. ‘아 내 맘도 모르고..’

일단 찍어 본다. 의자에서 찰칵, 찰칵!

그리고는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자의 신발을 들고~

오랜만에 신발 위에 올라서니 몸가짐이 달라진다. 한껏 긴장되는 몸에 기분도 살짝 좋아진다. 찍어 주는 사람 없이 우리끼리 카메라에 타이머를 해 놓고 사진을 찍으니 넷 중 한 사람 눈 감고 찍은 컷이 더 많다. 한 30분을 찍고서야 신발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신어 본 하이힐이다.


나는 하이힐을 참 사랑했다.

중학교 시절 대부분의 학교들은 교복을 다시 부활시켰다. 우리 학교는 시기가 좀 늦어져서 우리 다음 학년부터 교복을 입었다. 자연스레 나는 고등학교 3년만 교복을 입었다. 분명 초등학교 시절에는 마르고 쭉 뻗은 다리였던 것 같은데 중학교 시절 시작된 2차 성징과 함께 나의 몸무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고 그와 함께 굳센 다리가 되었다.

고등학교 교복 규율에는 검은색 구두나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굽은 5센티 이하의 높이였다. 다리를 조금이라도 길어 보이게 조금이라도 얇아 보이게 하는 길은 높은 굽의 신발뿐이다. 한껏 교복치미를 줄이고 짧게 입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교복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굽 있는 신발만 고수했다.

그 높고 경사진 한남동 길을 학교에 늦지 않으려고 5센티 구두를 신고 따따따 따다~ 뛰어내려온다.

한참 유행하던 소니 CD플레이어가 가방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한 손은 뒤의 가방을 고정시킨 채(그렇지 않으면 CD가 뛰어서 음악이 끊긴다)

해방촌 보성여고 버스정류장에서 내리고 다시 오거리로 내달려 내려간다. 쉽 없이 뛰고 또 뛰어 학교에 도착한다. 그렇게 달리면서도 나는 구두를 포기하지 않았다.


서른, 이십 대에도 해보지 않았던 소개팅을 열심히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나는 상대의 다른 조건은 묻지 않는다.

“나 힐 신어도 돼?”

내 키는 165, 어설프게 5센티만 신어도 170 초반의 남자를 만나면 내가 더 커 보인다. 그게 뭐 중요한가 싶기도 하겠지만 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의 배려는 없어도 되는 남자와 살고 있지만 이제는 힘들어서 하이힐을 신발장에 모셔 두고만 있다.


언젠가 막 봄이 되려는 시기 대학로에 친구를 만나러 가던 날이 순간이 생각난다.

코끝은 아직 찡한데 바람이 왠지 겨울스럽지 않았던 그날 나는 조금은 얇은 코트를 꺼내 입고 7센티 구두를 신었다. 오랜만에 드라이를 한 머리를 풀고 바람을 맞으며 걸었던 대학로. 그때 내가 들었던 음악.

성큼성큼 걸었던 그 길에 나의 긴장된 다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그 순간!


나의 머리 결을
스쳐가는 이 바람이 좋은걸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
밤은 벌써 이 도시에
나의 가슴속을
메워주는 이 불빛이 좋은걸
아무에게라도 말해주고 싶은 이 기분
밤은 어느새 이 도시에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
나는 또 뒤돌아 보지만
내게 남아있는 건 그리움
오랜만에 느껴 보는
느껴 보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이런 기분
내게 들려오는
흐뭇한 그 얘기들이 좋은걸
언제까지라도 간직하고 싶은 이 기분
밤은 어느새 이 도시에….

김현철 <오랜만에>





오늘 남편 회사 앞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제는 높은 굽이 힘이 든다.

그래도 오랜만에 낮은 부츠라도 꺼내어 신는다.

살짝 나를 긴장시키는 구두, 그 긴장감이 아찔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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