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변호인>
검사님은,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 당시 피해자를 폭행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 사건이 있던 날 새벽에 피해자의 시비로 피해자와 몸싸움을 벌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손등과 팔뚝 안쪽에 생긴 멍, 피해자의 손톱에서 발견된 피고인의 유전자 모두 새벽에 있었던 몸싸움 때문일 가능성이 잔존합니다. 그것들이 이 사건 당일 새벽에 발생했는지, 아니면 범행 당시에 발생했는지 구별할 수 있는 증거는 대체 무엇입니까?
변호인, 계속 말씀하시지요.
<변호인>
네, 재판장님. 이 날 긴급출동 했던 구급대원은 "집 안이 꽤 어질러져 있었지만 두 사람이 치고받고 싸운 흔적은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합니다. 온갖 현장에 출동한 경험이 있는 구급대원의 눈에도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였다고 볼 만한 흔적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피고인의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주민들의 진술을 볼까요? "11시 무렵 누군가다투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웃주민 배 씨의 진술입니다.
<검사>
구급대원의 진술은 의견에 불과합니다. 저희는 피해자의 찢어진 옷가지나 빠진 머리카락처럼 객관적인 증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 범행시각은 오전 11시경입니다. 바로 앞에 2차선 도로가 있는 피고인의 집에서, 그것도 심야가 아닌 낮에 다툼이 있었다고한들 옆집 사람이 그 소리를 듣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웃주민 배 씨는 이 사건 당일 새벽에도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진술합니다. 변호인의 주장대로 새벽에 몸싸움이 있었다면 오히려 주변이 고요한 심야에 배 씨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변호인>
재판장님, 검사님은 서 있는 자세에서 전도되어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경막하출혈이 발생하면 뇌맞춤타박상이 동반된다는 견해가 담긴 의학감정서를 증거로 신청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피고인 측도 국내 뇌 외상 전문가의 소견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10번에 9번, 경막하출혈과 뇌맞춤타박상이 동반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1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입니다. 피고인의 경우가 나머지 경우가 아니라고 결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전문의] 서 있는 자세에서 스스로 넘어지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경막하출혈이 발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뇌맞충격타박상이 나타나진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coup contusion, 그러니까 충격 부위 바로 밑에 생기는 타박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검사님, 추가로 제출할 증거가 있으신가요
<검사>
네, 재판장님. 이번에는 피해자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토대로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1시 12분. 피해자는 피해자의 어머니 방경자 씨와 통화를 했습니다. 방경자 씨는 피해자가 별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주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합니다.
11시 13분. 피해자가 방경자 씨에게 전화를 했지만 방경자 씨는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11시 14분. 방경자 씨가 피해자에게 다시 전화했지만, 피해자는 신음소리만 낼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적어도 11시 14분경에는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검사>
그런데 피고인은 11시 56분에서야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갑자기 의사소통을 하지 못할 정도의 상태로 신음소리만 내는 가족이 있는데 4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 시간 동안 피고인은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은 피고인의 집 욕실에서 발견된 수건 사진입니다. 이 수건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수건은 누군가 일부러 숨겨놓은 듯이 세탁기 뒤쪽에 놓여있었습니다. 피해자가 정신을 잃고 난 이후 40분 동안 피고인이 피해자의 혈흔을 닦는 등 현장을 정리하고, 주요증거들을 훼손했다고 볼 여지가 상당한 정황입니다.
<변호인>
잠시만요, 검사님. 그건 억측입니다. 검사님 말씀대로라면 11시 13분까지는 멀쩡하던 피해자가 11시14분에 의식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단 1분 동안 사람이 의식을 잃을 만큼 심각한 공격은 불가능합니다. 피고인은 쓰러진 피해자가 괜찮다고 해서 안방으로 옮긴 이후 상태를 지켜보다가 피해자가 구토를 하면서 사경을 헤매기 시작하자 그제야 119에 신고를 했을 뿐입니다.
<검사>
변호사님, 몇 초만에라도 치명적인 공격은 가능합니다. 이 사건은 술로 인해서 방어능력을 상실한 여성과 택배배달을 주업으로 하는 완력이 강한 남성의 몸싸움이라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피고인이 피해자를 주시하다가 구조를 위해서 119신고를 했다면, 119구급대원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피해자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들테니까요. 우선 당시 119신고 녹음을 들어보시죠.
곽 : 유민아! 유민아! 정신 차려라. 아니 지금 정신이 없다니까요?
119 : 함부로 인공호흡 하지 마시고…….
곽 : 후-욱, 후-욱.
119 : 선생님, 인공호흡 하지 마시라니까요. 가슴 압박해 주세요. 군대에서 배우셨죠?
곽 : 툭- 툭-
119 : 가슴 압박하고 계세요? 선생님?
<검사>
피고인은 구급대원의 지시를 전혀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인공호흡을 하지 말라는 지시에도 계속 피해자에게 바람을 불어넣고, 가슴도 제대로 압박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언가 물건을 치우는 소리가 섞여서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피고인에게 구조의 의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피고인은 40분 여 동안 본인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구호조치를 가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호인>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은, 피고인과 피해자가 심각한 몸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면 어떻게 피해자가 11시 14분보다 단 2분 전인 11시 12분에 전화를 받을 수 있었고, 단 1분 전인 11시 13분에 전화를 걸 수 있었냐 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히려 피고인과 피해자가 별 다툼이 없었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피고인이 실제 40분 동안 현장을 정리하려고 했다면 완전히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피해자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카락뭉치를 치웠다고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피고인은 그런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이 현장을 정리하고, 증거를 인멸했다는 증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검사는 무심히 스크린에 비치는 프리젠테이션 화면을 한 장 넘기고 설명을 이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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