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지금부터 ○○지방법원 2019고합○○호 상해치사 사건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인 곽호연.
곽호연은 꽤나 긴장한 얼굴로 피고인 석에 앉았다. 그의 옆에는 단정히 머리를 빗어넘긴 변호인이 앉아있었다. 변호인은 곽호연과 목례를 주고 받고, 다시 앞에 놓여 있는 기록으로 눈을 돌렸다. "검사님, 공소사실 낭독해 주시지요." 법대 중앙에 앉은 재판장이 말했다.
<검사>
피고인은 2018년 6월 30일 11시 14분경 자신의 집에서 피고인의 여자관계를 의심하는 피해자 홍유민과 언쟁하던 중 손으로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고,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피해자의 오른쪽 뒤통수 부위를 벽면에 수회 찧어 피해자로 하여금 2018년 7월 3일 외상성 뇌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방경자 여사는 공소사실을 듣고는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법정경위가 화장지와 시원한 물을 가져다 주며 방 여사를 진정시켰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족들은 벼락을 맞은 놈,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설을 내뱉다가 재판장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변호인>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그날 피해자를 폭행한 사실이 없습니다. 피해자는 알코올성 간 질환이 있을 만큼 심각한 알코올중독자로 그날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다가 스스로 넘어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고, 이로 인해 사망했을 뿐입니다.
곽호연은 법정에서도 기존 주장을 이어나갔다. 경찰 조사에서도, 검찰 조사에서도 곽호연은 피해자를 손찌검한 사실이 전혀 없고, 피해자 혼자서 방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변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이 웅성거렸고, 지역신문 기자들은 바삐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증거조사 하겠습니다. 검사님, 증거신청 해주시지요.
<검사>
먼저 부검감정서, 법의학전문가의 소견서를 증거로 신청합니다.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 당시 피해자를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손등과 팔뚝 안쪽에서는 최근 발생한 멍이 발견되었습니다. 법의학전문가는 손등에 생긴 멍이 방어흔, 방어손상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밝혔습니다. 누군가의 공격을 막다가 손등에 멍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팔뚝 안쪽 부위는 타인에게 팔을 강하게 잡히는 경우에 주로 멍이 생기는 부위로, 혼자 넘어진다거나 일상 생활을 하다가 무엇에 부딪쳐 자연스레 생길 확률은 낮다는 소견도 밝혔습니다.
네, 계속 말씀하세요.
<검사>
그리고 유전자감정서를 보시겠습니다. 피해자의 손톱 아래에서 피고인의 유전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전자 감정서에 비추어 보면 피해자와 피고인 간에 신체 접촉이 분명히 있었고, 그 신체 접촉이란 피해자가 완력이 강한 피고인을 막는 과정이었다고 봄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현장사진도 증거로 신청합니다. 기록 132쪽 하단 사진을 보겠습니다. 피고인의 집 거실을 찍은 사진인데, 피해자의 머리카락 뭉치가 빠져 있습니다. 입원해 있는 피해자의 옆머리에 머리카락이 뜯겨 나간 상처가 보이십니까? 상처는 생긴지 얼마 안 된 상처입니다. 피해자는 머리카락이 뜯어질 정도의 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더구나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은 왼쪽 어깨 부분이 찢어져 있고, 전체적으로 심각하게 늘어나 있습니다. 누군가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왜 옷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증거들을 종합하면, 피고인과 피해자는 이 사건 범행 당시 분명 몸싸움을 하였고,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모습이었다고 봄이 상당합니다.
<변호인>
재판장님! 검사님이 제시한 증거는 정황들입니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폭행했다는 직접증거가 없습니다
<검사>
형사사건에서 유죄의 인정은 직접증거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칙, 논리법칙에 위반되지 않는 한 간접증거, 정황증거에 의해서도 충분히 입증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변호인께서는 제가 제시하는 증거들이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되는 것이지, 정황증거 제시 자체를 문제삼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재판장>
인정합니다. 계속 진행하시지요.
<검사>
의학감정서입니다. 국내 외상전문가의 소견이지요. 재판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뇌는 뇌수 속에 있습니다. 뇌수라는 액체 속에 둥둥 떠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머리에 충격이 가해지면 뇌가 흔들리고, 뇌진탕이 발생하곤 합니다. 전문가의 소견에 의하면, 흔히 서 있는 상태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지면에 부딪쳐 뇌 경막하출혈(뇌의 경막과 지주막하 사이의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 일명 뇌맞충격타박상을 동반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서 있다가 혼자 전도되어 오른쪽 머리를 부딪치면 외상은 오른쪽 머리에 발생하지만, 머릿 안쪽을 들여다 보면 뇌는 오른쪽에서 발생한 충격에 왼쪽으로 움직이고, 뇌의 왼쪽 부위가 두개골에 부딪쳐 오히려 뇌의 왼쪽 부위에 출혈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뇌맞충격타박상이라고 합니다. 피해자의 부검사진을 보시겠습니다.
피해자에게는 뇌맞충격타박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 뒤통수 부위에 외상이 있었고, 그 부위에 경막하출혈이 발생했을 뿐입니다. 전문가는 상처의 형태를 보면 피해자는 평평한 면, 그러니까 벽면이나 지면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고, 이는 외력때문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피고인이 피해자를 일방적으로 폭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 기초해서 말씀드리면 전문가가 말하는 외력이란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가한 물리력으로 해석함이 상당합니다.
<변호인>
검사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하나 반박과 탄핵이 가능합니다.
변호인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준비해 온 자료를 실물화상기에 올려놨다. 법정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실물화상기 화면이 나오는 스크린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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