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쓰기 Dec 04. 2021

왜? 왜? 왜?

머식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필자가 쓴 글 작업물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을 수도 따라오는 사람을 내칠 수도 없었다.” 

마츠코의 결핍은 마츠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을 절망으로 밀어 넣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츠코는 오롯한 결정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마츠코가 자라며 만들어 낸 여러 명의 다른 '마츠코들'은 일생의 순간마다 각자의 선택을 했다. 마츠코는 마츠코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 마츠코의 자리


  어쩌면 왜 이러한 인생을 자처했느냐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수도 있겠 지만 그건 꽤 무책임한 발상이다. 맞아도, 죽는다고 해도, 혼자인 것보단  낫다며 괜찮다고 말하는 마츠코에게 가족은 어쩌면 그 어느 곳보다도 혼 자인 곳이었겠음을 알 수 있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종종 찾아와서는 쿠미와 아버지를 언급하며 가혹하 게 마츠코를 비난한다. 네가 돌아왔어야 할 자리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 지만 늘 '다시는 오지 마.'라고 한다. 직접 듣는 그 말은 마츠코에겐 다시 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고나 마찬가지다.


  마츠코는 그저 늘 새롭게 찾을 자신의 자리와 미래를 희망차게 꿈꾸며,  새롭게 맞이한 이들을 지나치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매 순간 모두에 게 최선을 다했다. 그런 마츠코의 희망과는 무관하게도 그녀의 일생엔  어긋난 비극만이 닥쳐왔을 뿐.






- 왜? 왜? 왜?


마츠코는 미련하고도 지독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애석하게 도 세상은 의심과 증오로 가득 찼기에 마츠코는 항상 되묻는다.


“왜? (なんで?)”


  마츠코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마츠코에게 혐오스런 일생은 다 사다난했던 일상도 아닌 '사랑' 없는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마츠코의 가족들은 말한다. 마츠코의 삶은 그저 시시했다고. 단연 시시했다.  마츠코는 삶에서 사랑이란 걸 발견했던가.






“어서와.  

(おかあり.)”





- 환상의 계단


  이토록 허무한 삶의 끝에서 꼭 쥐고 있던 마지막 희망은 마츠코가 생전  보았던 어떤 환상보다 극적이었으리라. 집을 나오며 내려왔던 방 계단  끝에서 다시 오르는 길로 인도했으니 말이다.  생의 끝엔 계단을 먼저 오른 이들, 마츠코가 진정 사랑을 갈구했던 가 족들이 있었다. 마츠코가 헌신을 다해 사랑했다던 남자들은 아니었다.  마츠코의 머리를 한 동생 쿠미와 활짝 웃어 보이는 아버지. 마츠코는 비 로소 '사랑'을 봤을 것이다.




                                                   “다녀왔어.  

                                                            (ただいま.)”





- 사랑?


마츠코는 생의 남자들을 사랑했을까? 마츠코는 자신의 '사랑 찾기 여 정'의 실패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미화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찾아낸 사랑은 아름다웠다고, 틀리지 않았다고.   

  사실은 마츠코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했다던 그(테츠 야)를 다자이 오사무 자체로 투영시킨 건 너무했다고. 그를 따라가고자  했던 낭만적인 최후를 비웃기라도 하듯, 물이 다 빠져버린 강물조차 그 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테츠야가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면 난 다자이가 자살한 다마가와에 서 죽어서 테츠야 곁으로 가려고.”







“인간의 가치란 건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뭘 해 줬 냐는 거겠지.”





  사실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끝장나게 멋진 말로를 맞이했느냐로 이어지 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츠코의 일생이 너무나 가치 있었다고 하기 에도 무리가 있지 않나.


그런데도 메구미는 말한다.  

“네 고모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멋진 여자였어.”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과연 마냥 베풀기만 하는  자의 가치일까?   

  메구미가 마츠코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을 때, 병원에서 명함을 쥐여주 었을 때처럼, 마츠코 본인에게 주어진 베풂의 기회를 조금 더 일찍 잡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자신을 구제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기회를 주었다 면. 어쩌면 마츠코는 새로운 '사랑'이란 개념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자신 을 사랑하지 못한 마츠코는 결국 '사랑'을 포기하는 말로를 맞이하고 만 다. 베풂은 나눔과 동시에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늘 노래를 부르던 마츠코,  

더는 혼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이전 11화 백조가 되지 못하더라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