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처음 영화를 보고 〈가족의 탄생〉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하츠에 할머니 가족도 혈연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 구성원 한 명씩을 만나고 선택하면서 지금의 가족으로 탄생한 것이다. 타인을 내 가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한 지점과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사람마다 감정이나 상황은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가족 관계를 구성하는 보편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혈연
〈어느 가족〉은 비혈연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로 친근하고 화목한 분위기의 가족이지만 살아가는 방식과 관계는 어딘가 묘하다. 이 가족 구성원에서 아빠와 엄마 역할로 보이는 오사무와 노부요는 불륜과 살인으로 엮였으며 딸과 아들 역할을 담당하는 린과 쇼타를 우연히 데려왔다. 아키와 하츠에도 친손녀와 할머니 관계가 아니다. 이러한 비밀은 대사나 상황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는데, 이들은 결국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결말에서 한 가족이 무너진 점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만약 이들의 관계가 혈연이었다면 다른 평가를 받았을까? 씁쓸함과 별개로 이들을 비밀과 함께 그대로 두어야 할지와 나중에 재결합을 바랄 상황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안타까움이 서사를 아는 관객으로서 이들 서로가 타인이란 걸 이미 감안하고 너그럽게 평가해서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츠네 할머니 가족의 상황처럼 화목한 가정이라도 친부모가 도둑질을 함께 하고 학교를 보내지 않는 사정이 있다면 비난이 클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확인을 하지 않고 원래 집으로 돌려보낸 것은 사법기관의 잘못이고 린의 부모님이 딱히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츠네 할머니 가족이 아이들의 대안 가족이었다 혹은 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노부요의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것 아닌가요?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라는 대사를 듣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평소에도 아이를 낳으면 부모라는 말에 회의적이었고 린에게 노부요가 더 나은 선택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혈연 가족은 부정적이거나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 몸에 상처가 있다는 대사와 친부모의 행동을 통해 린이 학대를 받았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한다. 이와 대조해 린은 하츠네 할머니 가족에서 충분히 사랑받는다. 영화는 오사무와 노부요의 잘못도 무조건 나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도된 모호함 때문에 이들을 악인으로 단정하기 어렵고 가족의 정의에서 중요한 지점을 고민하게 한다. 혈연은 가족을 정의할 최소한의 기준이 아니다. 하츠에 할머니 가족은 확실히 남보다 못한 혈연 가족과 비교해 더 나은 지점이 있다. 그러면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정이 가장 중요한지 궁금했다.
정
정은 굉장히 애매한 단어이다. 일단 이 글에선 기억이나 추억을 공유하면서 생긴 유대감으로 정의했다. 정은 혈연보다 더 가족 관계에 중요한 듯하다. 하츠에 할머니 가족을 대안 가족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도 공통된 추억이 있고 함께할 때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 바닷가에서 노는 장면에서 다들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러면 같이 있어서 행복하면 가족일까? 사실 성인끼리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책임을 동반하면서 가족이라 하겠다면 딱히 타인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개인이 선택한 가족을 결혼 외의 방법으로 사회 시스템에서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행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영화 속 가족의 구성원 중 아이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는 것을 양육이라고 말하긴 어딘가 부족하다. 노부요는 ‘워크쉐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보호받을 어린 아이들인 린과 쇼타를 포함하면서 계속 자신들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기에 이들은 대안 가족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느슨한 연대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제3의 요소
평소 사회가 가족 관계를 바라볼 때 혈연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키우지 않았을 경우도 친권을 부여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했다. 가족은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의 유대감을 강조한다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좋고 나쁨을 떠나 혈연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이해되었다. 피는 확실하다. 아무리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고 분노하고 한탄해도,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정보다 혈연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다. 관계에서 혈연보다 유대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가족〉을 보고 나니 가족의 정의로 여전히 부족했다.
노부요가 쇼타와 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게 두 가지 장면에서 드러난다. 하나는 동료와 누가 해고당할지를 두고 대화하는 장면인데, 노부요는 동료가 린을 약점으로 잡자 결국 자신이 해고당하고 린을 지키기를 선택한다. 다른 하나는 쇼타가 면회를 하러 간 장면이다. 앞서 취조 장면에서 ‘버린 것을 주운 것’이라며 항의한 모습과 다르게 친부모에 대해 말해주고 오사무에게 우리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이 노부요를 대안 가족으로 옹호하고 싶은 것과 오사무는 ‘아저씨’로 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차이의 이유다. 노부요는 어렴풋하게도 상대를 위한 선택을 한다. 린과의 관계도 그렇다. 하지만 오사무는 그런 지점이 없었다. 영화는 오사무와 쇼타가 물건을 훔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행동에서 도둑질이 일상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린이 등장한 후 쇼타가 조금씩 변한다. 특히 문방구 할아버지에게 들킨 후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이런 혼란을 언급하자 오사무는 단순히 린에게 시키긴 아직 어리다고 답한다. 이때 풀지 못한 의구심 때문에 쇼타는 린을 도둑질에서 배제하는 것을 넘어 경찰에게 쫓길 때 추락을 선택한다. 가족과 타인을 구별할 때, 누굴 위한 마음인지를 경계선으로 고려할 수 있다. 남보다 못한 관계는 가족들의 행동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발생한다. 단순히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것 이상으로 일종의 책임감이 있어야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오사무처럼 그런 지점을 고민하지 않거나 변하던 중 헤어졌다. 따라서 굳이 정의하면 이들은 ‘가족’이 아닌 ‘가족 같은 관계’에 가깝다고 본다.
〈어느 가족〉의 하츠요 할머니네 가족은 혈연 대신 유대감이 관계를 지탱한다. 친부모의 상황을 고려하면 린과 쇼타 입장에서 이러한 대안 가족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고아보다, 학대를 받는 것보다 누구라도 돌봐 주는 어른이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없는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과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범죄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이들을 가족이라 설득할 수 있는 지점과 부족했던 면을 고민했다. 그리고 혈연과 더불어 두 가지 가족의 의미를 제시했는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내밀한 ‘가족’이란 관계를 평가하고 정의하는 건 어려웠다. 〈어느 가족〉은 쇼타가 그동안 말한 적 없는 ‘아빠’ 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면서 마무리된다. 쇼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가족의 의미는 같이 산 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