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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쓰기 Dec 04. 2021

테두리 너머

희주, 〈우아한 거짓말〉, 이한 감독

  메마른 마음 밭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봄비 같은 영화였다. 시종일관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품은 오랜만이었기에. 하지만 이 봄비는, 당장의 가뭄은 모면하게 해주었지만 맛은 꽤나 씁쓸했다. 그리고 이 씁쓸한 빗물은 곧 나의 마음에 쓰라림을 남겼다. 이 세상에겐 너무나 과분했던 아이, 천지의 죽음은 나의 혀끝에 씁쓸함을 남겼지만 그 주위 사람들의 행동은 마음까지 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가족으로, 혹은 소리 없는 폭력의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저마다의 테두리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테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선천적인 성격에 의한 것이든 혹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든 각자에게 주어진 것들로 만들어진 이 테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그러다 결국 나도 모르게 자신의 테두리 내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저마다의 테두리를 토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사람을 파악하며 살아간다.

                                                            

                                                              “그럼 그냥 혼자 다녀”


  만지에게도 견고한 테두리가 존재했다.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았으며 그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도 친구 따위 없으면 그만이었던 만지에게, 왕따를 당하던 동생의 어두운 목소리는 별게 아니었다. 늦은 밤, 만지는 힘들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천지에게 등을 돌린 채 ‘혼자 다니라’는 쓸모없는 조언만을 해줄 뿐이었다. 만지에게 천지가 겪는 친구 문제는 그저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리는 골칫거리였으며 곧 지나갈 소나기에 불과했다. 동생이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만지는 자신이 그랬듯이 천지도 곧 초연해질 것이라고 판단해버렸다. 그렇게 언니 만지는 미처 자신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천지를 보지 못하고, 동생의 손을 잡아줄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나랑 화연이랑은 다르지. 나야 이유가 있고, 그냥 걘 누구 하나 죽어야 정신 차리는 애야”


  어린 미라는 좁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 없느니만 못한 아빠까지. 어린 소녀가 살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렇게 미라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테두리에 ‘남’이 들어갈 조그마한 공간까지 오롯이 ‘나’로 채워버렸다. 그렇게 미라의 테두리는 미라에게 오직 ‘나’만이 중요한 편협한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미라에게 있어 천지는 한때 우정을 나눴던 친구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빠가 천지의 엄마와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미라가 천지를 자신의 좁은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미라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친구였던 천지의 어려움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아빠에게는 퍼부을 수 없는 분노의 화살을 죄 없는 천지에게 끊임없이 쏘아 댔다. 그럼에도 미라는 떳떳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천지를 따돌릴 때 잠시나마 함께 친구가 되어준 것은 자신이었으며, 아무 이유 없이 천지를 괴롭히는 화연과 달리 자신에게는 천지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했기에. 게다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에게 버림을 받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은 천지였으므로, 그 아이가 자신의 손을 놓아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라의 테두리는 서서히 천지를 죽음 곁으로 떠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어리석다. 가족이자 친구였던 천지가 떠나고 나서야 만지와 미라의 테두리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지는 천지가 떠난 후 비로소 자신의 견고한 테두리 너머로 자신의 동생을 마주한다. 자신과 달리 마음이 연약하고 친구가 필요했던 그 작은 아이를, 그리고 이를 알아주지 못했던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천지의 죽음 후에도 화연을 방패 삼아 끝까지 도망쳤던 미라의 테에도 균열은 찾아왔다. 천지가 미라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래도 용서하겠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가해자임을 알려주는 말이 있을까? 이 단 한 마디로 미라의 테는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그렇게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미라는 그제야 인정한다. ‘미안하다’고. 하지만 한참 늦어버린 사과를 받아줄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남겨진 이들은 끊임없이 죄책감의 파도에 휩쓸린다. 마치 파국만이 유일한 결말인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계속된다. 영화는 남겨진 사람들의 불행한 삶을 그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을 올리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천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테두리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만지는 변해간다. 언제나 무뚝뚝했던 만지는 이제 엄마의 퇴근길을 기다리는 정다운 딸내미가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천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화연을 용서하고 품어주었다. 여기서 원수를 품는 만지의 행동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전개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 가장 손을 잡아 주기 어려운 화연의 손을 잡음으로써, 만지는 앞으로 그 어떤 이의 손도 늦지 않게 잡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반면, 안타깝게도 미라는 눈물 젖은 자백 이후 화면에서 자취를 감추기에, 어떤 길을 택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자신의 무너져버린 테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는지, 아니면 조각난 테를 모아 다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확실한 건 미라가 이후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는 오로지 미라 본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테를 인지하고 깨어진 순간, 우리에게도 선택의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선택의 순간 

  내 코가 석자. 우리는 ‘남’에게 한결같이 마음을 쓰며 살기에는 너무나 바쁜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할 일은 많고, 여유는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만 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나에 대한 것들로 가득하다. 어쩌면 그새 나도 모르게 나만의 견고한 테두리를 만들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느 날은 유독 말이 없어진 엄마를 그저 피곤한 날이겠거니 하며 넘겨버리고,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는 속으로 나의 고민이 더 무겁다고 단정 짓고는 성의 없는 조언만을 내뱉었다. 이렇게 만지와 미라처럼 나도, 나의 테두리 너머 자신의 손을 잡아주길 바라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줄곧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졸업이 다가오고 점점 더 사회의 매서움을 느껴가는 지금, 나는 나 자신의 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내게 이 영화는 이렇게 물어왔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이에 터무니없이 이상적이기만 한 대답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 가끔은 이 마음이 옅어질 수 있겠지만 감히 말해본다. 나는 완벽한 ‘나’가 되기보다 나의 테두리 너머 당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친구와 가족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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