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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쓰기 Dec 04. 2021

백조가 되지 못하더라도

희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다신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였다. 

  마츠코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마주한 그녀의 이야기는 호기심 많던 병아리였던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실사 영화였지만 동화 같은 화면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고, 숨 돌릴 새 없이 펼쳐지는 마츠코의 인생사는 중간중간 맥을 끊는 광고들도 감내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츠코의 최후를 목격한 병아리는, 동심이 파괴됨과 동시에 한동안 진한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Ⅰ. 노리오의 시선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마츠코의 남동생인 노리오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노리오가 보기에 마츠코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화목하던 가정을 무너지게 한 주범이었다.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마츠코 때문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빨리 세상을 떴으며 허약한 여동생 쿠미 또한 상태가 악화되다 결국 아버지의 곁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츠코라는 지지대가 없어진 가정은, 노리오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그런 그에게 마츠코는 가뭄에 콩 나듯 찾아와 그저 겉치레 같은 가족의 안부를 묻기만 할 뿐, 끝까지 가족을 외면했던 ‘혐오스러운’ 인간이었다.  


  병아리 시절의 나 또한 노리오와 마찬가지였다.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는 마츠코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집착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츠코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불륜과 매춘과 같은 비도덕적 행동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고, 뒤늦게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서도 도망칠 뿐이었다. 분명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마츠코는 자신의 결핍에 사로잡혀 이를 모두 놓쳐버리는 듯했다. 이렇듯 어린 나에게 마츠코는 가족에 의한 결핍을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채우려 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불쾌한 인물이었으며 시간이 지난 지금, 흐릿한 기억 속의 서랍에 수납되려던 참이었다. 


Ⅱ. 쇼의 시선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백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느 순간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의 운명은 백조가 아님을 직감한다. 쇼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집을 나와 밴드 활동을 할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지만, 현재 그의 기타에는 수북한 먼지만이 가득했다. 쇼는 의미 없이 그저 인생을 흘려보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쇼에게 존재조차 몰랐던 고모 마츠코의 죽음은 불현듯 찾아왔고, 그는 그녀의 일생을 마주한다.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 고모처럼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을 복돋워 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너덜너덜하게 상처를 입고 고독하고 … 그렇게 철저하게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 신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쇼가 마주한 마츠코는 아버지의 웃음을 위해 주저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며, 수없이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원수나 다름없었지만 마츠코에게 눈부신 사랑을 받은 류는 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마츠코는 나의 신이었다’고. 누구보다 백조가 되고 싶어 했지만 가장 새까만 까마귀로 생을 마감한 마츠코는 그렇게 누군가를 구원했다.

  시간의 흐름이 비껴가는 화면 속 쇼와 달리, 병아리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이제 쇼와 같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소름 돋게도 쇼와 똑같이 살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하루 나의 운명은 백조가 아님을 깨달으며 무력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에. 원인은 슬럼프였다. 평생을 음악에 바쳐 대학에 왔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슬럼프가 찾아왔고, 열심히 할수록 퇴보하는 아이러니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렇게 5년, 이토록 나약한 자신이 역겹고 그토록 사랑한 음악이 고통스럽기만 하자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후 고통은 덜해졌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최고의 연주를 한다’는 평생의 목표를 상실한 나는, 그저 세월의 흐름을 목도할 뿐이었다. 


Ⅲ. 나의 시선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답답하고 가여웠다. 마츠코는 개인으로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으며, 여전히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여러 번 일시정지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얼굴을 구겨가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웃음을 주고, 끝없는 배신에도 류를 끝까지 믿어줬던 그녀의 모습이 말이다. 마츠코는 그 누구에게도 주었던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을 주었던 멋진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한들 마츠코의 일생은 정말 시시한 인생인가.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슬럼프를 겪은 후 가장 먼저 든 고민이다. 이전에는 개인적인 성공을 이룬 삶이 가장 가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지금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다시 만난 마츠코는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백조가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별 볼일 없이 끝나버린 자신의 인생도 가치 있는 인생이었다고 말이다. 

  먼 훗날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또 다른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마츠코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츠코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녀를 회상하며 마츠코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표정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츠코는 단연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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