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할머니
시댁 조상들을 위한 천도재가 있던 날, 스님인 큰 이모가 조용히 말했다. 시할머니가 오셨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은 마치 바람이 지나가듯, 내 귓가를 스쳐갔다. 의례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오고, 무언가를 말하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그저 절차일 뿐. 그래서 시할머니가 오셔서 하신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살아생전 기이한 기운을 지녔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마음에도 그 힘을 느꼈고, 그래서 돌아가신 후에도 그분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을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시할머니는 달랐다. 늙고, 병들고, 조용히 세상을 떠난 평범한 노인이었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울림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날, 나는 아주 커다란 깨달음을 마주했다. 남편에게는, 그 시할머니가 내 외할머니만큼이나 신령한 존재였다는 것을. 그분 또한 죽어서도 여전히 자손을 지키고 있었고, 그 사랑은 외할머니처럼 무섭도록 깊고, 절절하도록 강했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사랑을 지닌 분이었다는 것을. 자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품고, 감싸고, 지키는 존재. 세상의 이치도, 도리도, 그 사랑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떠올린 순간 나는 시할머니도 그럴 것을 알았다. 원수 같은 남편. 내가 그에게 해를 입히면, 시할머니의 혼이 나를 찾아올 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은 내 안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내 돈을 들여 이런 적을 불러들인 걸까?’
불편함만이 가득했던 시댁 조상들을 위한 천도재를 마친 후, 며칠이 지나고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시댁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시댁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그들 중에는 이미 돌아가신 시할머니도 함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시할머니는 집안의 중앙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곁에는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여자의 존재가 궁금했다. 왜 이 여자가 시할머니와 함께 있는 걸까? 그녀는 누구일까? 나는 궁금증에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나를 마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내 눈을 피했다. 그 순간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때, 시할머니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았다. 시할머니가 그 여자를 데려온 이유가 분명했다. 시헐머니는 나를 쫓아내고, 그 여자를 남편과 맺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시댁 식구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나를 피하며, 그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분노가 솟구쳤다. 사고 치는 남편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내가 얼마나 시댁 사람들에게 애써 왔는데…, 내가 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동안의 모든 노력과 헌신이 부질없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꽉 막혔다.
너무 화가 나고 어이없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침대에 몸을 반듯이 눕히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꿈은 마치 실체처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할머니가 나를 내쫓고, 다른 여자를 며느리로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 불합리하고 황당한 생각에 내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내가 먼저 남편과 이혼하고 싶어했던 사실은 완전히 잊고, 그저 시할머니에게만 분을 쏟고 있었다. 왜 그런 걸까? 그저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불합리한 전개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2001년 결혼 전, 시할머니를 처음 뵀을 때의 모습이 떠올렸다. 그녀는 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쪽지고 있었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밭에서 일을 하시는 그분의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깊은 주름이 얼굴에 가득했다. 온몸은 마치 고사 직전의 나무처럼 메말라 있었다. 손끝이 가늘고 푸석했지만, 나물을 다듬을 때의 손은 신이 들린 듯 바쁘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할머니의 몸은 많이 굽어, 허리가 거의 90도 정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 때문에 걷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녀는 작은 걸음걸이로 여전히 주변을 챙겼다.
그리고 시할머니는 늘 혼자였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시할머니 방에 가져다 드리면 언제나 방에서 혼자 밥을 드셨다. 남편에게 물었다. “왜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식사를 안 하세요?” 그가 대답했다. “할머니는 원래 그래.” 그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무엇인가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밖에서 돌아오시면, 바로 술잔을 들며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냈다. 그는 술을 매우 즐기셨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조용히 방에서 자작할 뿐이었다. 그러다 간혹 남편을 보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내 손자, 귀한 내 손자, 내 제삿밥 차려줄 내 귀한 손자.”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미소가 묻어 있었지만, 그 미소는 언제나 짧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분의 삶은 거칠고, 때로는 눈에 띄게 고독해 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아도, 나는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사랑받고 자란 기억이 있어서 늙고 병든 시할머니에게 따뜻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을 달리해서 살고 있고 1년에 겨우 몇 번 보는 우리 사이는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했다.
어느 날, 시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셔서 힘겹게 양말을 벗으실 때, 그 손끝이 움켜잡는 양말의 구겨진 모양새와 흙투성이 검은 발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나는 그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시할머니의 발을 씻겨드렸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러나 가장 큰 정성을 다해드리고 싶었다.
2003년 즈음의 겨울, 시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의 장면도 떠올랐다. 갑자기 시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댁에 도착했을 때, 이불에 누워 계셨던 시할머니는 전혀 활기가 없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건강하게 회복될 거라 말하며 따뜻하게 웃어드렸다. 그리고 혹시 몰라 할머니가 입고 있는 옷에 넉넉하게 노잣돈을 넣어드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좋은 곳에 가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시할머니는 메마른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힘겹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증손주를 못 봐서 정말 아쉽다…”
그 말에 마음이 아려왔다. 나는 진심을 담아 약속했다.
“걱정 마세요, 곧 증손주를 낳아 드릴게요.”
놀랍게도 시할머니는 웃으시며 일어나 앉으셨다. 가족들에게 인사도 건넸다. 할머니가 회복한 듯 보여 가족들은 안도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대설이 내린 겨울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마치 세상을 모두 잡아먹을 듯 다 삼켜버렸다. 눈이 덮인 도로, 고속도로가 마비되면서 수많은 차량들이 길에 갇혔다. 차를 버리고 대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와 남편은 인천에서 출발하여 문경까지 눈보라를 뚫고 한참을 달렸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길고 험한 여정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나와 남편은 정말 운 좋게 시댁에 도착했다.
시할머니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집안의 한쪽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설(大雪)을 뚫고 찾아온 손님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청소하려고 청소기를 들었다. 고요한 대화와 고요한 슬픔이 흐르던 집안에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도 그 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 순간, 술에 취한 시아버지가 큰 소리로 나를 꾸짖으셨다.
“누가 상갓집에서 청소기로 시끄럽게 하냐?”
시아버지의 말은 술기운과 함께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쿵 하고 닿았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새댁이 뭐 알겠냐?”
주변에 있던 마을 아주머니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위로하려는 듯 보였지만, 내 마음속은 차갑고 어수선한 분위기만이 가득했다.
“새댁, 아부지가 속상해서 그런가 보다. 저 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결혼한 지 겨우 1년. 나는 아직도 새로운 삶에 적응 중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결혼생활은 그저 설렘과 기대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것이었는데 지난 1년간의 결혼생활은 때로는 숨 막히는 고통과 어리둥절함의 연속이었다. 장례식장이 되어버린 시댁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도 어설펐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결혼 후 내가 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고,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내 어깨를 무겁게 했다.
가족들과 손님들의 슬픔 그리고 시아버지의 질책 사이에서, 나는 그냥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시댁에서 시할머니의 상을 치르는 내 자신이 얼마나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시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발원할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처한 현실이 너무 버겁고, 힘들기만 했다.
이것이 시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참 좋은 손주 며느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꿈에서 시할머니가 다른 여자를 남편과 맺어주려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는커녕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며 분노했다.
시할머니가 왜 그럴까?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시할머니도 외할머니처럼 자손의 곁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시할머니는 돌아가신 후, 몇 번이나 나에게 자신이 있음을 알렸는데 내가 그 신호를 무시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시할머니가 나에게 아예 마음이 돌아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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