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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 비가 그치면

by 나야

# 산책로에서

팔등에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때 우린 산책로 중간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다. 사실 집에서 나올 때 우산을 가져갈까도 생각했었다. 장마철이니까. 그럼에도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라며 빈손으로 그냥 나왔다. 둘 다 실없이 낙천적이었고, 솔직히 좀 번거롭기도 했다.


심지어 "비 온다"는 나의 말에도 남편은 딴소릴 했다.


"비 맞아? 지나가던 새가 오줌 싼 거 아니고?"


어이없는 농담에 웃음을 흘리면서도 우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어중간한 위치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산책로 입구였다면 집으로 곧장 되돌아갔을텐데, 지금은 지나온 만큼 다시 가야 했다. 부지런히 보폭을 넓히면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20분은 족히 남은 거리, 꾸물거렸다간 길 위에서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주위가 부산스러워졌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던 사람들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거나 하나, 둘 우산을 펼쳐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들고 올걸.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은 빨리 걷는 게 최선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 빨래를 널면서


세탁기에서 쿵더럭 장구 소리가 났다. 탈수 코스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날은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빨래를 널었다간 제대로 마르지도 않고 쉰 냄새가 날 가능성 99.99999%였다.


순간 건조기가 아른거렸다. 이참에 한 대 들여놔? 해마다 장마철이면 구매욕이 상승했지만 놓을 자리도 마땅찮고 비용도 만만찮고 계산기만 두드리다 넘어간 지가 몇 년째던가. 창밖을 내다보며 남편에게 얘기했다.


"빨래 마르면 건조기에 돌리자."


"어?"


"집 앞에 빨래방 생겼잖아, 건조기만 쓰고 오자."


남편의 눈이 반짝거렸다. 가뜩이나 냄새에 민감한 그는 건조기의 ㄱ자만 나와도 표정이 산뜻해졌다. 우리는 탈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빨래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 뚝 그쳤다. 여전히 먹구름이 무겁게 깔려있었지만 빗방울은 멎었다.


우린 또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그냥 널어? 아님 빨래방으로 가?


남편은 기왕이면 건조기에 뽀송하게 말리자는 쪽이었고 나는 반대였다. 날이 개면 햇살이 나올지도 몰랐다. 아니, 나올 것만 같았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니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내기를 제안했다. 햇살이 나서 빨래가 잘 마르면 내가, 굽굽하고 눅눅해서 건조기에 싸들고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남편이 이기는 거였다.


'따라랑~'

마침 세탁기가 빨래를 마쳤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우선은 비가 그쳤으니 베란다에 널기로 했다. 빨래를 탈탈 털면서 우린 각자의 승리를 장담했다.


"분명히 냄새난다, 이거. 습도가 높아서 빨래가 안 마르게 돼 있어."


"혹시 또 모르지, 해가 나올 지도!"


그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다행히 밤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기예보에는 다음 날 비소식이 들어있었다. 내 마음에도 슬금슬금 먹구름이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건조기를 걸 괜히 고집부렸나...' 젖은 빨래를 잔뜩 싸들고 빨래방으로 향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함부로 베팅하는 게 아니었다며, 후회를 안고 잠이 들었다.





# 다시 산책로


어느새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머리에도, 팔뚝에도 서늘한 물기가 번져갔다. 우리는 경보선수처럼 빠르게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20분은 족히 걸렸을 거리를 오늘은 거의 10분 만에 도달했다.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면 아파트로 진입할 수 있었다.


헌데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저 신호를 놓치면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기다려야 했다. 여기까지 얼마나 숨가쁘게 왔는데, 그럴 순 없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곧 파란 불이 깜빡거렸다. 10초, 9초, 8초... 신호가 막 바뀐 순간, 아슬아슬하게 횡단보도 건너편에 다다랐다.


"다 왔다!"


참았던 숨을 훅 토해내며 남편이 말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 집에 닿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왠지 뭉클했다. 그것은 올림픽 100미터 경기에서 결승점을 무사히 통과한 선수들의 세리머니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갑자기 비가 세차게 퍼붓기라도 할까 봐 서로 말한마디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래도 곁에 남편이 있어서 과감하게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그는 앞서 가지 않고 반걸음 뒤에서 따라와 줬다. 덕분에 비를 맞고 가면서도 든든했다.


어차피 모든 길은 가야만 끝이 난다.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그것만으로 힘이 날 때가 있다.




# 그래서 빨래는 어떻게 됐을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나는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맑은 하늘에 노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베란다에서 빨래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끈적하게 남아있던 마음의 물기마저 말끔하게 날려주는 날씨였다. 보고만 있어도 상쾌했다. 빨래 마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살다 보면 예기치 않게 소나기를 만나거나 장마가 이어질 수도 있다. 아무리 우산을 써도 피할 수 없는 비가 있다. 그럴 때는 그저 맞고 지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만 그 순간에도 함께 비를 맞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나 역시 그런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면 내심 뿌듯할 것이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당분간 흐린 날씨가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장마가 따로 없다. 수시로 비가 쏟아지니까.


그렇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저 구름 뒤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왕이면 눈부신 햇살이 있을 거라는 쪽에 한표 던진다. 언젠가 비가 그치면 기어이 해가 뜰 테니까. 그리고 당신이 함께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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