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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기운

제자리를 지키는 싱그러움에 대해

by 나야

"나무가 언제 저리 컸대? 잎이 빼곡해졌어!"


며칠 사이 아파트 화단이 울창해졌다. 오가며 매일 보던 단풍나무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쯤 되면 장맛비와 햇볕이 '동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비가 내린 뒤엔 나무도, 풀도 어김없이 훌쩍 자라 있으니까. 남의 집 애는 잘도 큰다더니 식물도 그랬다.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속도가 매번 예상을 뛰어넘었다.


반들반들 윤기 나는 잎사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양분을 빨아들이는 힘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지난봄, 하느작거리던 연두색 줄기가 어느덧 진초록의 위용을 뿜어내며 다부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식물의 생장은 햇볕 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모진 비바람에 흔들릴수록 뿌리는 땅속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고, 더욱 굳건해졌다. 고통은 생명을 단련시키는 자양분이었다.




"시장에 가면 마늘을 꼭 사야 해."


주말 아침, 전화가 걸려왔다. 마늘이 제철이니 김장용 마늘을 미리 사두라고, 친정엄마가 지령을 내리셨다.


알이 굵은 마늘 두 접, 10kg짜리.


구매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며 남편과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채소 골목에 들어서자, 빨간 양파망에 든 마늘의 성벽이 길게 이어졌다. 무더기로 쌓인 마늘 포대 중 어느 걸 골라야 하나? 암만 봐도 그 마늘이 그 마늘 인데.


첫 번째 가게에서 나는 물었다. "이 마늘 몇 kg에요?" 두 번째 가게에선 다르게 질문했다. "이게 김장용인가요?" 세 번째 가게에서는 나름 꾀를 낸다고 낸 것이, "김장용, 10kg짜리 있어요?"


곧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가게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지점에 선 우리는 목소리를 낮췄다. 기밀문서를 전하는 요원들처럼 소곤거렸다. "당신은 어느 집이 좋아?" 남편은 1번, 3번을 골랐다. 다행히 나도 의견이 일치했다. 최종 어디로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근데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몸을 돌려보니 앞서 들렀던 마늘 가게 사장님들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최종 3번 마늘로 합의를 봤다. 기준은? 학창 시절 지우개 굴려 찍기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정도만 밝혀둔다. 어쨌든 정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이게 몇 kg야?"


"10kg요"


"무게도 달아봤어?"


"아뇨."


"그럼 이게 몇 접이야?"


"두 접. 사장님이 그랬어요, 두 접이라고."


마늘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친정엄마의 질문이 길어졌다. 계산이 흐린 딸내미를 미덥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거면 직접 사러 가시지'라는 말을 꿀떡 삼키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마늘 한 접은 100개, 두 접은 200개. 우리말 세는 단위는 언제 들어도 헷갈렸다.


통상 이럴 땐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게 답이었다. 통마늘 50개를 얼른 주워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나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아까 채소 골목에서 마늘값을 계산하던 중, 구석에 놓인 완두콩 자루를 발견했던 것이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동안 밥에 다양한 콩을 섞어보았다. 검은콩, 호랑이콩, 강낭콩, 제비콩... 세상에 콩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한데 알이 굵은 호랑이콩이나 제비콩은 익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취사가 완료되었지만 콩이 설익어 낭패를 본 적도 여러 번이었으니.


그중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콩은 완두콩이었다. 속이 말캉말캉해서 먹기도 좋았고 고소하면서 달큰한 맛이 났다. 또한 당을 낮추고 심장을 튼튼하게 하면서 항암효과도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다 믿지는 않지만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마트에선 완두콩을 자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마늘을 고를 때와 달리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완두콩 한 자루를 냉큼 구입했다. 콩깍지가 그대로 붙어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내 눈에 이미 완두콩을 향한 콩깍지가 씌었으니까.




저녁을 먹자마자 우리는 식탁에 완두콩을 풀어놓았다. 껍질을 얼른 까보고 싶어 마음이 들썩거렸다. 볼록한 콩깍지를 열 때마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속에는 푸른 진주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알맹이를 후드득 쓸어 담을 때 내마음도 같이 둥글어졌다.


"색깔도 너무 예쁘다, 그치?"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고 하는 건, 어긋난 표현이 아닐까. 그건 속에 든 알맹이가 얼마나 싱그럽고 탐스러운지 모르고 한 소리겠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은 콩깍지를 제거했을 때 시작된다는 걸 외면했거나.


빈 콩깍지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완두콩은 지정 좌석제라는 것. 콩알마다 각자의 자리가 따로 있었다. 어린 콩들이 하루하루 자리를 지키면서 영글었다고 생각하면 그저 놀랍고 경이로웠다.


제 자리를 지킨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것은 꾸준함과 성실함을 요하는 일이며, 숱한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역할을 다했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만큼 싱그럽고 특별한 일이다.


한편으론 위안이 되기도 했다. 완두콩도 제 자리가 있다니, 어쩌면 우리도 대자연의 질서 안에 들어있겠구나. 늘 같은 자리에서 곁을 지켜주는 남편이 새삼 고맙고 애틋해졌다.



콩깍지를 열면 푸른 보석이 가득하다.
완두콩 지정 좌석제



다음 차례는 마늘이었다. 남편은 통마늘 50개를 한 번에 다 까겠노라 선언했다. 그가 식탁에서 마늘을 까는 동안 온 집에 마늘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진즉에 항복을 선언하고 물러났다.


"우리 집에 드라큘라는 절대 못 오겠네."


화장실에 가면서 딸아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당신 몸에 마늘 냄새 배이겠어."


"마늘이 몸에 좋은 건데 뭐. 건강한 냄새라서 괜찮아."


마늘 까기에는 꼬박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남편은 기어이 뱉은 말을 지켰다. 수북하게 쌓인 껍질을 모아서 마지막 뒷정리도 깨끗이 마쳤다. 나는 박수를 쳤다.


"우와, 나라면 도저히 못했을 거야!"




다음 날 아침에 걸려온 친정엄마의 전화,


"어제 마늘, 두 접에서 12개 모자라더라. 내가 다 세봤어."


통마늘 개수가 궁금해서 잠을 설쳤다며, 정확히 188개라고 알려주신 엄마. 별로 놀랍진 않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어제 그 통마늘 50개, 엄마 사위가 간밤에 다 깠어요. 진짜 대단하죠?"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마친 모녀는 각자 만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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