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맛있는 위로

마음이 부서질 때

by 나야

어둑한 시간,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몸이 나른해졌다. 낮동안 아등바등 움켜쥐고 있던 긴장이 열손가락 끝으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가방을 아무 데나 풀썩 내려놓고 식탁의자에 걸터앉았다.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 마늘빵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기말고사를 치르는 중학생 딸을 위해 엊그제 남편이 사다준 빵이었다. 어차피 먹는 사람도 딸아이 밖에 없었다. 공부하다 지치거나 힘들 때 먹을 거라고 선포한 탓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이가 한번에 한두 개씩 얼마나 아껴먹는지 알고나선 더더욱.


그런데 오늘은 나도 모르게 봉지에 손이 갔다. 하나를 집어 들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자작.

마늘빵 부스러지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알싸하면서도 짭조름한 마늘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바삭한 식감에 달짝지근한 맛, 깨무는 소리까지 완벽한 '자극의 집합체'라고나 할까. 한번 먹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들어갔다. 10개짜리 봉지를 다 먹어치우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가 왜 시험기간에 마늘빵을 찾는지.




딸은 주로 갑갑할 때 빵봉지를 열었다. 암기과목 시험범위가 너무 넓다거나, 미로 같은 영어 문장 속에 갇혔다거나, 아니면 친구와 사소한 오해가 생겼다거나. 그때마다 아이는 주문처럼 "마늘빵!"을 외치면서 와작와작 스트레스를 씹어 삼켰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사람이 어떻게 먹는 걸로 스트레스 풀 수 있냐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지, 단짠단짠에 의지하면 몸에 해롭다니까?


그런데 오늘처럼 힘 빠지는 날, 마늘빵이 이토록 의지가 될 줄이야. 너무 맛있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퇴근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씻지도 않고 뭐하는 건지. 그럼에도 남편은 말없이 지켜봐 주었다. 덕분에 나는 온전히 먹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우걱우걱 빵을 삼키면서 낮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주위 사람들의 실망 어린 눈빛이 가슴에 박히던 순간이 자꾸 어른거렸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지? 왜 다른 방안을 찾지 않았을까? 더 용기를 내지 못했어, 왜?


끝없는 자책이 밀려왔다. 어금니로 빵조각을 잘게 부수며 생각했다. 무기력한 감정에 사로잡힌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무엇보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사실 가장 실망한 건 나 자신이었지만 스스로를 위로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날이 저물었다.




엄마, 어떡하지?


딸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회의 중이었다. 화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시험 망친 거 같아.


난 또 뭐라고. 금방 이성을 정비하고 답장을 보냈다.


기말고사는 2학기에 또 돌아와.

다만 지금 이 기분을 잘 기억해.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나름 쿨한 엄마가 되어 명쾌하게 처방을 내렸다. 이내 회의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 말을 누군가 지금 내게 똑같이 한다면? 내심 서운했을 것이다. 그 속엔 진정한 위로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얼마나 잘하고 싶어 했는지,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방법을 제시하기 전에 진심어린 공감이 먼저였는데, 단계를 건너뛰었다. 빨리 해결하고픈 마음이 앞선 탓이었다.




심난한 하루 끝에 얻은 나의 처방전은 마늘빵이었다. 달고 짜고 자극적인 맛에 홀려 정신없이 먹어댔다. 입천장이 까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 덧 한 봉지를 싹 비웠다. 온 종일 가슴을 짓누르던 복잡한 상념들도 같이 비워진 듯 했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면, 최소한 먹고 싶은 거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야지. 그 생각을 하니 속이 후련했다. 마침내 자유를 얻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그는 소파에서 야구중계를 보고 있었다. 9회 말 동점 상황. 지금부터는 실수하지 않는 팀이 이긴다. 순간 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자의 배트 끝에 걸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높이 뜬 공이었다. 한데 공을 잡으려고 달려오던 외야수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눈이 부셨거나 바람이 불었거나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곧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하필이면 그 외야수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비추었다. 난감해하는 그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비정한 세상 같으니라고. 가장 속상한 사람은 공을 놓친 외야수 자신일텐데, 굳이 얼굴을 보여줘야겠냐.




화면에서 남편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아픈 뒤로 그는 음식을 가려먹었다. 대표적으로 설탕과 매운 음식, 밀가루나 튀긴 음식을 멀리했다. 좋은 것보다 나쁜 걸 먹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싱싱한 토마토나 오이, 버섯 등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 위주로 챙겨 먹으려 노력했다.


문득 안쓰러웠다. 그도 얼마나 먹고 싶은 게 많을까. 이렇게 더운 날은 시원한 맥주 한 잔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오장육부가 개운해질텐데. 지글지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근심을 씻어 내리던 그 순간이 얼마나 그리울까. 스트레스가 쌓이면 자극적인 음식이 당기는 게 당연한데도 남편은 용케 참아냈다. 때론 그 모습이 고독한 수행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마늘빵을 먹어치운 내가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혼자 먹어서 미안해, 당신도 먹고 싶을 텐데."


"괜찮아."

"완전 자극적인 맛이었어. 이 세상의 안 좋은 건 내가 다 먹어치울게!"


어이없는 농담에도 빙긋이 웃어주는 남편. 축 쳐진 몰골로 마늘빵만 먹어대는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다려 준 것도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입에서 마늘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늘빵을 너무 많이 먹었나.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곧 딸이 학원 마치고 올 시간이었다. 식탁에 흘린 빵부스러기를 치우며 다짐했다.


아이가 돌아오면 안아줘야지. 다음 시험에 잘하면 된다는 말보다는 얼마나 힘들었냐고, 속상했던 마음부터 다독여줘야지.


날이 밝으면 당장 마늘빵을 사러 가야겠다.


keyword
이전 20화식물의 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