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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오케스트라

시간의 화음을 쌓아올리다

by 나야

지난주 남편의 정기검진 결과가 나왔다. 염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호전되길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풍선처럼 부푸는 마음을 몇 번이고 눌러앉혔다. 섣불리 기대를 품었다가 먼 우주에서 어떤 존재가 시샘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르칠만한 아주 사소한 욕심도 품지 않으려 애쓰면서 시간을 기다렸다. 다행히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결과지 앞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음 정기검진은 석 달 뒤. 그때까지 우린 지금의 식단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채소와 과일, 단백질을 골고루 섭취하고 설탕이나 가공식품 멀리하기.


그리고 매일 저녁 산책하기. 이전에도 운동삼아 산책을 자주 나갔지만 바쁘거나 피곤하면 빼먹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들이 쌓이면 우리 몸속의 노폐물도 쌓이는 거라고, 피곤할수록 더 나가서 걷자고 다짐했다.




어제도 저녁 먹고 바람막이 점퍼를 챙겨 집을 나섰다. 선선한 바람에 아카시아 향이 실려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내게 남편이 먼 산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 아카시아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멀리서 향을 뿜어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물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를. 우리는 숨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곧이어 꽃길이 펼쳐졌다. 노란 유채꽃, 하얀 데이지, 분홍색 여리여리한 저 꽃은 이름이 뭐지? 꽃검색을 돌려보니 '낮달맞이꽃'이란다. 이름이 곱기도 하지.


선한 얼굴의 낮달맞이꽃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남편이 말했다.


"꽃 중에 화살촉 꽃이라는 것도 있어."


"화살촉?"


"꽃이 뾰족하게 화살촉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대."


"신기하네, 그런 건 누가 처음 발견했을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꽃이나 나무 이야기를, 낮에 있었던 일 또는 집안일을 의논하기도 한다. 그래선지 요즘 회사에서 뭔가 억울하거나 답답한 일이 생기면 해 떨어지는 시간만 기다리게 된다. 얼른 집에 가서 산책 가자고 해야지. 남편한테 이르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오늘 복도에서 사장님이 나한테 90도로 인사하더라."


"그래?"


"맨날 우리 앞에서만 위해주는 척 해.

그래놓고 나중에 딴소리한다? 월급동결 이러면서."


"꼭 보면 뒤로 호박씨 까는 인간들 있어. 말로만 떠들고."


무턱대고 편들어주는 이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그렇게 참았나 싶을 때도 있다.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다.


어느 순간에는 이 저녁산책이 마치 '일기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기장에 그날그날의 일상을 기록하듯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오늘을 써 내려가는 여정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심정을 무심히 툭 꺼내보여도 좋은 시간. 덕분에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할 힘이 생긴다.




걷다 보면 길 끝에 벤치가 나온다. 일명 VIP석이다. 운 좋으면 벤치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만날 수 있다. 어제도 그랬다.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소리와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 와골와골 맹꽁이 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소리의 파동이 서라운드로 몰아쳤다.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작은 소리 위에 더 작은 소리가 겹겹이 쌓이면 이런 음악이 되는구나. 화음이 기가 막혔다. 듣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개구리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어디서 소리를 내는 거지? 대체 어떤 시간을 견뎌야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어떤 악기로도 흉내 내지 못할, 자연의 오케스트라 연주 앞에서 나는 먼지보다 작아졌다. 세상의 욕심과 다툼이 다 무슨 소용인가. 풀잎보다 가벼운 저 사소한 존재들이 우주를 지탱하는 거대한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노래가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쏟아지는 풀벌레 소리를 이 공간에 죄다 풀어놓고 싶었다. 플레이를 눌렀다. 풀벌레 연주가 한층 더 풍성해졌다. 이게 노래에서 나는 건지, 실제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둠을 뚫고 곧장 뻗어나간 소리들이 밤하늘을 채웠다.



어제는 별이 졌다네

나의 가슴이 무너졌네

별은 그저 별일 뿐이야

모두들 내게 말하지만


오늘도 별이 진다네

아름다운 나의 별 하나

별이 지면 하늘도 슬퍼

이렇게 비만 내리는 거야


나의 가슴속에 젖어오는 그대 그리움만이

이 밤도 저 비 되어 나를 또 울리고

아름다웠던 우리 옛 일을 생각해 보면

나의 애타는 사랑 돌아올 것 같은데

나의 꿈은 사라져 가고

슬픔만이 깊어 가는데

나의 별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짙어 가는데


- 여행스케치, 별이 진다네



처음 들었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노래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가사는 슬퍼도,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답게 들리는 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외로움이나 그리움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으니까.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둡진 많았다. 밤의 나무들이 바람에 춤추는 것도 잘 보였다. 어릴 땐 멀리서 반짝이는 별이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한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나무들이 대단해 보인다.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마음처럼 빛나는 능력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에 수국을 만났다.

"여름 수국이 벌써 피었네. 올여름 엄청 덥다는데, 당신 어떡하지?"


"여름이니까 덥지. 더워야 여름이지."


"그래도 덥고 땀나면 수술한 자리가 간질간질하잖아."


"그런 거 따지면 어떻게 살아. 적응해야지."


어떤 계절을 만나도 우리는 또 적응할 것이다. 시간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조금씩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함께 걸어갈 것이다. 오랫동안,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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