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을 지나갈 때
"네 자리뿐이야."
같이 TV를 보던 남편이 툭 던진 말이다.
"응? 뭐가?"
"...... "
더 이어지는 설명이 없었다. 앞뒤를 싹둑 잘라먹는 그의 화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짜증이 일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잖아."
싸늘해진 공기를 가르며, 부메랑이 날아왔다.
"당신 요즘 짜증이 늘었더라."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아냐고, 그리고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잖아, 말할 때."
나는 비겁하게 지나간 일까지 끄집어냈다. 그의 말투가 얼마나 부적절한지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서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리고 TV를 보는 척하면서, 속으로 열심히 속기록을 되돌려보았다. '네 자리뿐'이라는 말은 고속버스 좌석의 '빈자리 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편의 병원 정기검진이 바로 다음 주였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버스로 3시간 거리. 그동안 나는 남편이 병원 갈 때마다 같이 다녔다. 내가 못 가면 아들이 대신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아들도 도저히 일정 조율이 불가능했고, 결국 남편 혼자 가야 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내심 서운했을 것이다. 고속버스 좌석을 예약할 때도 본능적으로 외로웠을 것이다. '네 자리뿐'이라는 짧은 말속엔 그 모든 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물론 나도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말투'를 걸고넘어진 것은 최근 그의 말이 나를 콕콕 찌르는 날이 잦았기 때문이다. 정기검진 날짜가 다가올수록 남편은 예민해졌다. 중대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처럼.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기에 내가 너무 바빠졌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종종 거리다 눈 떠 보면 새로운 아침이었고, 쓰지 못한 일기가 일주일치 넘게 쌓여갔다. 그의 서운함을 받아줄 여유가 미처 없었다. 그의 걱정과 불안이 쉬어갈 공간도 물론 없었다.
대신 내 마음속엔 '실수하면 안 되는 일들'에 대한 부담감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시끄러운 축제가 끝나고 쓰레기 뒹구는 행사장에 온 것처럼 정신없는 일상에서 불만이 쌓여갔다. 특히 그의 말투가 신경을 건드렸다.
말할 때, 그는 고등어 장수가 됐다. 고등어 토막 치듯 앞뒤 싹둑 자르고 핵심 단어만 하나 툭 올려놓았다. 아무리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알아서 헤아리고 잘려나간 앞뒤 정황을 연결동작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과정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몇 해 전, 나는 다리를 다쳐서 석 달 정도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녔다. 어느 날 절룩거리면서 가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아이가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엄마, 저기 장애인이 오고 있어, 기다려주자."
덕분에 나는 엘리베이터를 놓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그런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그 아이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잡아줘서 고마워. 근데 아줌마가 사실 장애인이 아니고, 몇 달 뒤면 깁스를 풀 건데, 지금은 잠시 치료 중이야. 그래서 목발 짚고 다니는 거야."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진다는 건, 도둑의 발이 심하게 저린다는 증거. 당시 나는 다리가 아픈 것보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더 불편했다. 길을 가다가도 근처에 누가 있으면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굳이 아픈 발로 땅을 디디기도 했다.
그래놓고 좀 당황스러웠다. 내 안에 이런 열등감이 있었다니.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걸음걸이가 더 이상해졌다. 병원이 바로 코앞이었는데도, 오가는 길이 한참 멀게 느껴졌다. 그제야 알았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먼저 쪼그라든다는 것을.
그 시절 목발을 짚고 절룩이며 가던 내가 지금의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다리 깁스 정도야 풀고 나면 펄쩍펄쩍 날아다닐 수 있지만, 암세포와의 전쟁은 마지막 페이지를 알 수 없다. 그 막연한 불안이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 무력감이 얼마나 어깨를 짓누르는지, 감정의 진폭은 가히 상상도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괜한 시비나 걸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나 자신이 참 못나보였다. 스스로 자책하고 있던 어느 날, 휴대폰 화면이 반짝했다. 긴 터널을 지나온 남편의 메시지였다.
- 항상 미안해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보자마자 목안이 울컥했다.
- 아니야, 내가 미안해. 자기도 많이 불안하지. 이해 못 해줘서 미안해. 서운한 거 있으면 풀어요.
- 아니야, 당신한테 서운한 거 없어, 그냥 내가 못나서 그래.
- 아니야, 내가 미안해. 당신 마음도 몰라주고.
- 아니야, 그런 거 없어, 난 괜찮아
우리는 서로 '아니야', '아니야'를 연이어 주고받았다.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뜨거운 진심이 담긴 세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