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징크스를 고백하며
현관문을 열자 중학생 딸이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체육대회 날이라 평소보다 일찍 가야 한다며 아침밥도 뜨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던 녀석이다. 표정을 보니, 혹시 우승?
아니, 우리 반 5등 했는데?
근데도 이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아우, 빨리 말하고 싶어서 혼났잖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줄다리기 끝나고 쉬는 타임에
쌤들이 달리기를 했거든?
쪽지에 적힌 학생을 찾아서 같이 뛰는 건데
영어 쌤 알지?
모를 수가 없는 선생님이었다. 영어를 쉽고 재미있게, 특히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술술 답해주신다는 분.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오라는 말에 아이는 문제집을 들고 교무실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대체 남의 나라 말을 왜 배워야 되냐고 툴툴대던 녀석의 '영어 싫어증'을 고쳐주신 분.
그때 나는 우리 반 응원석에 앉아있었어.
근데 갑자기 영어 쌤이 오시더니
내 손을 잡고 막 뛰는 거야.
전교생이 다 쳐다보는데, 얼굴이 터질 뻔했잖아.
얘기하는 동안 아이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얼마나 신났을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주책없이 등수가 궁금했다.
4등이었나? 어차피 상관없다고,
이건 추억이잖아!
이전까지 녀석은 체육대회를 극도로 싫어했었다. 중간연습, 총연습에 반별 응원까지, 무슨 연습이 이렇게 많냐고 틈만 나면 불평이었다. 그랬는데, 달라졌다.
나중에 영어쌤한테 물어봤어,
쪽지에 뭐라고 적혀있었는지.
어떤 애들은 전교에서 키가 젤 큰 학생, 머리 짧은 학생... 그런 거였거든?
나는 뭐였는지 알아?
'가장 예의 바른 학생'이었어. 으흐흐...
마지막 문장을 얘기할 때 입꼬리가 표 나게 실룩거렸다. 벅찬 희열이 내게도 전해졌다. 운동장의 열기와 함성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신 그 선생님께 넙죽 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
달리기 장면이 유독 감격스러웠던 이유는 최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숨이 턱에 차도록 내달리던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나의 손을 번쩍 잡아끈 대상은 다름 아닌 '브런치'였다.
그날따라 휴대폰이 드르륵 자주 몸을 떨었다. 라이킷 수가 평소보다 많아서 심상찮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브런치 인기글', '에디터픽 최신글'에 올라 있었다. 다음 메인화면에도 노출되었다.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
지난 2월 브런치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을 보면서 부러움을 꼴딱꼴딱 삼켜왔다. 조회수나 구독자수, 라이킷 수가 절대반지는 아니지만 나는 왜 늘 제자리걸음인지, 조바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스스로 한계를 절감하면서 깨달았다. 이것은 내 몫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에게 같은 룰이 적용되고, 결과물도 매번 공개되는 시스템. 그 안에서 부족함을 인정하며 돌아서야 했다. 대신, 잊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글쓰기를 결심했는지.
4개월 전, 남편의 암투병기를 그리면서 다짐한 첫 번째 원칙은 '담백함'이었다. 불운을 과장하거나 행복을 포장하지 말고 솔직하게 풀어보자는 마음.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구독자 수, 라이킷 수'에 동공이 흔들렸다. 먼지보다 가벼운 마음이 사방을 떠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 신이 손을 내민 것이다. 내가 쓴 글이 큰 화면에 노출되면서 조회수가 무섭게 올랐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런 걸까.
가장 기뻐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요즘 웃을 일이 없다며 어깨가 처져있던 그는 자신이 등장하는 글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사실에 마냥 즐거워했다. 급속충전을 마친 휴대폰처럼 눈에 생기가 차올랐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나의 또 다른 행복이었다.
덕분에 용기가 생겼다. '무조건 하면 된다'는 아니지만, '하다 보면 될 수도 있구나'를 실감했다고나 할까. 나도 그렇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마침내 달려갈 수 있도록.
그러나 역시 공짜는 없었다. 다음 글을 연재할 시점이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밑천이 금방 드러날 텐데? 나이키 2탄으로 아디다스나 뉴발란스를 써야 하나.
창피한 말이지만 '소포모어 징크스'도 떠올랐다. 운동선수가 데뷔 1년 차에 성적이 좋으면 2년 차 경기가 힘들어진다는 뜻. 나 원 참, 고작 이만한 일에도 징크스 운운하는데, 구독자 수가 더 불어나면 이건 뭐, 일상생활이 되겠냐고.
소위 '인기 작가님'들을 부러워했던 속내도 고백한다. 하지만 '왕관의 무게'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었다. '골프랑 선거는 고개 들면 진다'더니,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치켜들자 한 글자도 쓰기가 어려웠다. 초조해졌다. 발행일은 다가오는데 글감은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엔 뿌연 먼지만 쌓여갔다.
지난 며칠간, 겉으론 구독자가 늘고 라이킷 수가 (본인 기준) 기록을 경신하는 와중에도 글쓰기는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글쓰기엔 최종 목적지가 따로 없음을. 그것은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언제, 어디에 닿을지도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이번 역을 지나면 다음 역이 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내게는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출발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긴 여정을 헤맨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민들레 홀씨처럼 떠다니며 작은 씨앗을 틔울 수 있기를. 다만 그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또 시작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