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래된 기침소리

6주 차 과제 - 간결하게 글쓰기

by 나야

정윤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 6주 차 과제,

주제는 <엄마>입니다.


그 시절엔 골목 담벼락이 대합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최적의 입지. 지대가 높아 동네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고 동구 밖에서 드나드는 움직임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남향이라 볕이 잘 드는 것도 장점이었다.


앞에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친구를 기다리곤 했는데, 가장 많이 기다린 대상은 바로 엄마였다.


특히 토요일 아침이면 거의 지정석이었다. 나는 열중쉬어 자세로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차가운 시멘트 벽에서도 온기가 느껴졌다. 심심하면 발끝으로 툭툭 땅을 파거나 줄지어 날아새들을 구경했다.


저만치서 아슴푸레 어떤 형체가 보이기 시작하면 발꿈치를 높이 들었다. 목을 길게 빼고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비록 손톱보다 작아 보였지만 엄마가 틀림없었다. 강아지가 주인을 알아채듯 나는 멀리서도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까. 마음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몸을 돌려 한 달음에 집으로 내달렸다. 방으로 뛰어들어가 배를 깔고 엎드려 공책을 펼쳤다.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화사한 얼굴이 코앞에 다가왔다.


우리 나야, 공부하는구나!


자꾸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럴수록 연필을 쥔 손가락에 더 힘을 주었다. 모음을 쓸 때 세로선의 첫 부분을 살짝 꺾어 간절하게 끌어내렸다. 이 미세한 차이를 엄마가 봐줬으면. 하지만 이내 고무장갑을 집어든 엄마는 구석구석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반지르하게 윤이 났다.


빨래도 일사천리였다. 수돗가에서 철썩철썩 빨래 방망이 소리, 촤르르 헹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빨래줄이 소매를 펄럭거렸다.


바지런한 엄마는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집안 곳곳을 살피더니 어딘가에 박혀있던 카세트를 꺼내왔다. 철커덕. 테이프를 넣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엄마는 역시 조용필이 최고라고 했다. 어느새 나도 발장단을 깐닥거렸다. 다다다 도마질 소리와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에도 리듬이 따라왔다.


점심 나절이 되자 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오셨다. 일주일 만에 온 가족이 밥상 앞에 모였다. 메뉴는 주로 된장국이나 계란말이, 콩자반, 멸치볶음. 늘 먹던 반찬인데도 꿀맛이었다.


허겁지겁 삼키다 사레가 들린 적도 있었다.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와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가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혹시 열이 있는지 이마도 만져보았다. 엄마의 보드라운 손이 얼굴에 닿자,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가 시골집에 오는 날이면 나는 수시로 마른기침을 해댔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끌어올려서 케객, 켁. 그러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눈을 맞추었다. 등이나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딸, 괜찮아? 나는 그 순간을 고무줄처럼 늘어뜨리고 싶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직장을 구해 도시에서, 나는 시골 외가에서 따로 산 지 10여 년. 그리움으로 물든 유년기를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 생활에도 변화가 왔다. 도시에서 엄마와 같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떨어져 지낼 땐 마냥 좋기만 하던 엄마와 단 둘이 한 집에 있으니 왠지 서먹하고 어색했다.


막 사춘기에 들어선 시점이라 그랬을까. 엄마는 왜 할머니처럼 매사에 너그럽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늘상 바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자 토라져서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엄마도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결국 부딪히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는 종종 삐걱거린다. 암만 가족이라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을 수 있지.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잖아? 도돌이표가 끝도 없다. 이젠 포기할 만도 한데 기를 쓰고 상대를 바꾸려 드는 것까지 꼭 닮은 모녀지간.


돌아서 또 걱정이 밀려든다.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 어쩌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오만 상상과 함께 가슴이 철렁 한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귓전에 마른기침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그리움이 양지바른 담벼락 앞으로 달려간다.



+11월 24일 마지막 문장 수정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간결하게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