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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규 Jul 01. 2022

그의 로망은 축가

제발 김동률 말고

결혼 얘기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내 남자 친구는 내게 이따금씩 이런 얘기를 해왔다. 

"나는 내 결혼식에서 내가 축가를 부르는 게 로망이야."

갑자기 스무 살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라고 하는데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자기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신랑이 하는 축가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신랑이 직접 하는 축가는 굉장히 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 나로서는 생각지 못한 발언이었지만 처음에는 생각 없이 넘어갔다.


그렇게 결혼 준비가 시작되고 웨딩홀 상담을 직접 받는 동안 웨딩홀에서 패키지 및 옵션으로 들어가는 리스트 품목 중 축가가 있었다. 전문 축가를 부를 경우 금액이 얼마가 드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상담해주는 직원분이 자리를 비운 동안 남자 친구는 이건 필요 없는 거라고 축가가 적힌 글자를 손가락으로 그었다. 내가 '왜?'라고 반문하자. 남자 친구는 '내가 할 거야'라고 했다.


사실 남자 친구는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다. 가수 뺨치냐고 물어본다면 그랬다면 가수를 했겠지라고 반문하겠지만 아무튼 내가 남자 친구가 노래 부르는 모습에 반해 사귀자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반한 노래는 축가와 전혀 딴판이었던 '더원 - 사랑아'였다. 그런데 축가를?


노래하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에 연애 초반 데이트의 주는 노래방이었다. 각자 동네에 안 가본 코인 노래방이 없을 정도로 노래방을 자주 갔고 주로 남자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남자 친구를 통해 듣고 싶은 노래를 주문했고 남자 친구는 그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잘 부르는 장르가 있었고 잘 어울리지 않는 장르가 있었다.


잘하는 장르라고 한다면 주로 예전 남자들의 노래방 애창곡인 버즈, 더원, 앰씨 더 맥스, 먼데이키즈 등의 내지르는 고음을 잘 부른다. 나도 그런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나 잘 어울리지 않는 장르는 성시경, 폴 킴, 크러쉬, 멜로망스 등의 음역대가 일반 남자보다 더 높은 음역대를 가진 가수들의 노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 친구는 좋아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노래가 있다. 김동률, 이적, 바이브 노래이다. 그리고 굳이 이 노래들을 나를 놀려먹기 위해 모창까지 하면서 따라 부른다. 어이없어.


아무튼 플라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면 김동률 노래를 부르고, 임창정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면 바이브 노래를 부르는 청개구리 같은 남자가 본인이 축가를 부르겠다고 하니 검열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 생겼다. 우선 어떤 축가를 부르고 싶은지를 물었다. '김동률 - 감사'였다.


축가 하면 김동률이고 김동률이면 감사지. 이미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축가로 불렀고 축가 하면 저 노래인 것도 안다. 근데 그냥 내가 이 노래를 별로 결혼식에서 듣고 싶지가 않은 게 문제였다. 남자 친구에게 김동률 노래 싫다고 말한 뒤 가입한 결혼 준비 관련 카페에서 축가에 대한 글을 검색해 댓글에서 추천으로 나온 노래 30곡을 뽑아 30곡을 듣고 OX로 적어 남자 친구에게 보냈다. 결론으로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노래와 남자 친구가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봤을 때 네 곡이 나왔다. (남자 친구가 부르고 싶다는 '그' 노래까지 포함해서)


김동률 - 감사

김범수 - 사랑의 시작은 고백에서부터

임영웅 - 이제 나만 믿어요

임창정 - 결혼해줘


물론 '그' 노래를 제외하고는 내가 원하는 노래이다. 축가를 할 사람이 결정됐고 노래도 축약됐으니 이제 연습과 최종 결정이 남았다. 남자 친구에게 남은 시간은... 없다. 그냥 연습하라고 했다. 네 개의 노래 중에서 가장 잘 어울리고 잘 부르는 노래로 결정하기로 했다. 연습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다.


결혼식에서 직접 신랑이 축가를 부른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 행동인지 알기 때문에 남자 친구에게 감사하다. 그렇지만 축가를 혼자 결정하는 건 용서 못하기 때문에 추후 축가 경연대회 이후 다시 글을 쓸 예정이다. 남자 친구 로망 실현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덜 싸워가면서 준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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