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산다 5화
삶은 여행이라고들 한다. 끊임없이 나아가며 새로움을 만나고 헤어지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그래, 수긍이 간다. 그러나 여행 또한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떠나왔다.
내게 여행은 큰 사건이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을 내리치는 폭포였다. 이번 여행을 떠나오면서도 역시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단순한 쳇바퀴 같았던 내 20대 초반을 깨부술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으로 여겼다. 여전히 그 의미는 유효하지만 한 달째 이리저리 떠도는 여행은 내게 삶이 되었다. 한정된 예산과 시간 안에서 매일 어디로 갈까, 어디서 잘까 하며 고민하는 게 요즘 내가 하는 일이다. 그런 순간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렇게 덤덤해지며 한국에서 부풀린 여행의 흥미를 차차 잃어간다. 일상과 다름 없어졌다. 그러다 사기나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가득했던 기대는 자괴감으로 변하기 일쑤다. 그러나 누가 말했듯 길을 잃으면 새로운 길이 나오고 좌절을 하면 희망이 보인다. 삶이 되어버린 여행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단 한 사람, 단 한 곳이라면 날 좌절시키는 모든 것을 뒤엎기에 충분했다.
지난 3월 7일, 파리 북역으로 향하다 소매치기를 당했다. 그날 아침, 며칠 전 열흘정도 함께한 동생들을 한국으로 보내며 얻은 상실감과 우중충한 날씨에 꿀꿀한 기분으로 거리로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그날은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 날이었다. 시위대와 경찰들로 어수선한 도시에서 처진 기분 때문에 터덜터덜 정신줄을 놓고 걸었다. 숙소로 가는 기차에 오르려는 찰나, 줄이어폰으로 흐르던 음악이 끊겼다. 낡은 탓에 줄곧 끊기곤 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줄이어폰만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미 기차는 출발했고 사람들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답답했다. 나도 모르게 앞에 있던 아줌마에게 털어놨다. 그러나 그녀는 러시아인으로 내 영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말로 “나 폰 잃어버렸는데 아줌마도 조심하세요.” 하고 푸념하며 숙소 근처 기차역에서 내렸다. 일일 룸메이트였던 남아공 의사 아저씨의 위로 덕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쉬울 리는 없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려 짧은 글을 쓰는 게 내 최선이었다. 그렇게 파리를 떠났다.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갈까 지도를 보다 날씨라도 좋은 밑 지방에 가자고 생각했다.
5시간 기차를 타고 니스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봤던 드넓은 바다와 내리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바다 냄새에 약간의 상쾌함을 느꼈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짐을 두고 시내를 지나 바닷가로 걸어갔다. 엄청난 길이의 해변과 거침없이 다가오는 파도 그리고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이 날 무작정 걷게 했다. 마침 뒤에서 부는 바람은 그깟 일에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는 듯 날 힘차게 밀었다. 모든 고민이 하찮게 느껴졌다. 내가 안고 있던 하많은 막막함은 모두 잠깐의 풍경으로 사라질 고민들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해변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와 호스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인사말을 할 줄 알던 호스트는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해 주려 움직임을 아끼지 않았고 내 정체성과 문화를 물어왔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표정과 몸짓으로도 충분히 그의 친절을 느꼈다. 우울과 좌절이 가득했던 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인해 비어 버린 마음은 어느새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이렇게 쉽게 감동을 받는 사람이었던가.
니스와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형, 누나들, 초행길을 직접 같이 가준 공항에서 만난 승무원을 비롯한 낯선 이에게 친절히 길을 알려준 수많은 사람들, 지쳐가는 날 기운 차리게 했던 포르투에서 만난 대학생들, 마드리드 민박집과 호스텔 사람들, 연락해주는 친구들, 기다리는 가족들. 날 압도하던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어디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본 풍경들, 드넓게 펼쳐진 산맥과 강과 바다들.
단 하나의 사람, 단 하나의 공간이라도 날 반겨준다면 그곳이 어디든 재지 않고 찾아가리. 여행이 삶인 걸 느낀 것처럼 삶도 여행이라면 다가올 일상에서도 같은 태도로 임하리.
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포르투를 거쳐 스위스 베른에서 김윤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