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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찬 May 03. 2024

아침이슬/Morning dew

나의 상실을 품는 훨씬 큰 상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Like the morning dew after a long weary night. Gracing each leaf with a shine finer than pearl's When sorrows in my heart bead up one by one. I climb on the morning hill to learn a little smile. A blazing red sun rising up over the graveyard. The sweltering heat of the day is only my trials. Here I go now, into the wilderness of badlands. Leaving all the sadness behind, here I go now.


https://youtu.be/sTXxCCOobFk? si=Bg4 gvATAiBLw2 faI

윤도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부른 <아침이슬>




팔레스타인 평화 집회에 참석한 모습들


나는 토요일마다 광화문 인근에서 열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평화와 독립을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 우리는 한 곳에 모여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호를 외치며 도심을 행진한다. "Stop killing children!", "Free Palestine!" 구호를 외치다 보면 문득 죄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의 눈빛이 머리에 스친다. 그 잔상은 지친 내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생각하게 한다. 아, 나는 도저히 지금 가자지구 가족들이 겪는 상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누구나 그렇듯 상실을 겪는다.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잃고 간절히 바랐던 나의 모습도 잃는다. 상실의 순간은 늘 거북하다. 또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나도 모르게 그 아이들을 떠올릴 때면 나의 상실은 한 없이 작아져 고개를 숙인다. 그 아이들이 오히려 나를 품는다. 아, 내가 밉다.


<아침이슬>은 1971년 '뒷것' 김민기 선생님이 발표한 민중가요다. 가사는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다. 1987년 7월,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서 그리고 2016년 11월,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은 이 시를 목놓아 불렀다. 설움이 가득한 마음을 안고서 작은 미소를 지어보는 그 가슴은 얼마나 아프랴. 마침내 그가 모든 서러움을 버리고 거친 광야로 내딛는 걸음은 얼마나 많은 상실을 품은 걸음인가. 그의 걸음은 다음 세대인 나의 서러움까지도 품고 있다. 아, 나는 이 땅에 민주화를 꽃피우기 위해 그들이 견뎌야 했던 비와 바람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은 그녀의 시 <한 가지 기술>에서 말한다.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것들이 본래부터 상실될 의도로 채워진 듯하니 그것들을 잃는다고 재앙은 아니다. (중략) 당신을 잃는 것조차(그 농담 섞인 목소리와 내가 좋아하는 몸짓을), 나는 솔직히 말해야 하리라, 분명 상실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그것이 당장은 재앙처럼 보일지라도." 그녀의 시를 읽은 류시화 시인은 말한다. "온갖 상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 재앙은 아니었노라고 시는 말한다. 비숍은 이 시에 열일곱 차례나 수정을 가해 마침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 수정의 과정이 곧 그녀 자신이 겪은 상실들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과정이었다. 상실을 경험한 우리의 마음이 끝없이 수정을 거듭하는 것처럼."(<시로 납치하다_류시화, 73p)


같은 책에서 류시화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려질 운명이다. 상실은 인간 존재의 공통된 경험이며, 어떤 상실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시로 납치하다_류시화, 71p) 그렇다. 우리는 모두 상실을 겪는다. 상실은 우리 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만 그 자신은 상실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늘 상실과 함께다. 나는 상실을 이렇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나는 나의 상실에게 이렇게 외쳐 보기로 했다. "Nothing special!" 내가 겪은 상실은 이미 많은 이들이 겪어온 것이었다. 대학을 낙방해 수능을 여러 번 치렀던 것도, 파리에서 아이폰을 소매치기당한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것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실이다. 류시화 시인은 말한다.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문제들에 너무 쉽게 큰 힘을 부여하고, 그것과 싸우느라 삶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가질 여유가 없다.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인데도 마음은 그 하나를 전체로 만든다. 삶에서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더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게 한다. (중략)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정말로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 3년 간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독했던 생활은 내 삶의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파리에서 폰을 잃어버린 후 나는 베를린에서 친구들과 러닝을 하다 아끼던 헤어밴드를 잃어버렸다. 상실을 알아챈 내가 단 한 발자국도 뒤로 가지 않았다고 친구는 말했다. 비싼 비용을 치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상실로부터 비롯되는 미련을 뒤로할 수 있게 된 나를 발견한 기쁨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나 류시화 시인은 조언한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라.' 물론 이런 조언은 함부로 흉내 내선 안된다. 그 조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때 의미가 있다."(<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_류시화>, 28p)


나는 다른 사람의 상실을 듣기로 했다. 나는 요즘 사람의 고유함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이 다른 무게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4수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 온 여행에서 소매치기당한 일은 농담거리가 아닐 수 있다. 내게 익숙한 상실이라고 해서 함부로 "Nothing special!"하고 외치면 안 된다. 그가 갖고 있는 상실은 그의 무게로 들어야 한다. 류시화 시인은 말한다. "부서진 파편들을 서둘러 주워 모으려고 하면 안 된다. 파편에 손을 다친다. 칼 융이 말한 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치유받지 못한다는 것. 그저 놓아줄 뿐이라는 것. 우리는 흉터를 보면서 자신이 상처를 극복했음을 알 수도 있고, 흉터를 보면서 상처 입은 일을 기억할 수도 있다. (중략) 상실, 오, 우리의 상실이여! 그리고 삶이 선물하는 느린 회복과 소생이여! 나는 시인일 뿐 심리상담사가 아니며, 그녀의 아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내가 그녀에게 약속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한 가지뿐이었다. 앞으로 언제든 마음이 많이 힘들면, 내가 다시 외국에 나가고 없을 때 이 돌집에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도 된다고. 열쇠 두는 곳을 알려줄 테니. 섬의 태양과 바다, 비에 젖어 검어진 돌들, 그 돌들에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돌집에서의 날들이 조금씩 그녀를 위로해 나가리라 기대하면서. 그녀가 슬픔을 충분히 겪었다고 판단되면 신이 그 슬픔을 가져갈 테니까."(<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_류시화>, 78p)


나는 상실을 이야기하는 이 글을 쓰면서 상실을 겪었다. 새벽 3시 35분, 나는 판단력이 흐려진 탓에 저장하는 것을 깜박하고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버렸다. 아, 고개는 젖혀지고 아득해지는 정신. 모니터 속 백지를 보며 외쳤다. "Nothing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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